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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깨달음은 ‘환상’이다

기사승인 2016.10.04  14: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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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수] 다시 ‘깨달음’

한국불교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그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최고의 목표가 깨달음에 있다”고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그것을 ‘깨달음이라는 환상’이라고 표현한다. (참고로, 이 글은 지난해부터 벌어진 현응 스님의 글에 대한 전통불교의 반발-수불스님으로 대표되는-과는 상관이 없다. 나는 그 분들의 글이나 말은 전혀 보지 않았다. 십여 년 전에 현응 스님 책만 대충 본 적이 있다.)

1. 깨달음?

   
▲ 김광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아(無我)사상을 깨닫는다는 것이고, 공(空)사상과 연기법(緣起法)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반야지혜를 닦는다든가, 선정 참선을 닦는다든가, 교학을 한다든가, 육바라밀을 한다든가, 여러 가지가 있겠다. “그래, 그게 수행이지, 그렇게 깨달아서 부처가 되면 윤회를 벗어나고, 해탈, 열반을 얻는 거지. 그런데 뭐가 문제란말인가?” 여기까지 나는 당연한 불교의 기본을 말하였다. 그리고 열반의 정의는 “탐진치의 불길을 불어서 끈다.”이다. 그것이 곧 성불이고 불교의 목표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를 제기하자. 탐진치(貪瞋痴)의 불길이 과연 깨달음만으로 꺼지는가?

“깨달으면 차차, 혹은 자연히 꺼지게 된다?” 언제? 그렇게 막연히 얘기하면 안 된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 그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깨닫는다고 해서 저절로 탐진치의 불길이 꺼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깨달아서 쉽게 꺼진다면 그것을 “세 마리 독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치로써 깨닫는다고 해도, 마음의 불길은, 마음의 갈애심은, 마음의 탐욕심은, 마음의 증오심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치(어리석음)라는 독사 이외에 탐(貪, 갈애), 진(瞋, 싫어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독사를 두 마리 더 설정한 것이다.

즉,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은 우치(愚癡)라는 한 마리 독사만 잡을 뿐, 나머지 두 마리 독사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깨달으면 자연히 (혹은 쉽게) 貪과 瞋은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다른 두 마리가 중요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세 마리라고 따로 말씀하신 것이다. 깨닫더라도 마음 밑바닥에 있는 갈애심, 애욕, 소유욕, 자기집착, 자기애(自己愛) 이런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깨달음이라는 단어의 뜻을 그렇게 확장시키기 말라는 것이다. 바로 그 단어의 뜻을 그렇게 손쉽게 확장하는데서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런 것까지도”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중이다. 바로, 자기 마음(욕애와 갈애)을 조복 받지 못하고, 참선해서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할 일을 다 했다고 하지 말아달라는 말씀이다. 왜냐. 두 마리의 독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선정 수행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 몇 가지를 겪고서 깨달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은 여러 경전에서도 경계하였고, 조사의 어록에서도 크게 경계하였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도 이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우치(愚癡)를 극복하여 해탈한 것을 혜(慧)해탈이라고 하고, 갈애와 증애심을 극복한 것을 심(心)해탈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그것은 생각 머리의 해탈과, 마음 본능의 해탈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교학에서도 이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원효(元曉)도 마명(馬鳴)도 해탈로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우리를 결박하는 장애(障碍)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고 했으니, 그것이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煩惱障)이라고 했다. 논서에서 말하는 소지장이 법집을 일으키는 장애라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머리의 장애이다. 그보다 더 무섭고, 더 어려운 것이 가슴의 장애인 탐심과 진심이다. 탐심은 실제로는 raga를 번역한 말로, 그것은 물질적인 탐욕보다는 “애욕의 근본”을 말한다. 그러니 그것이 단지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 단박에 없어진다는 것은 공허한 억지일 뿐이다.

소지장, 안다는 것의 장애, 그것은 불교의 진리인 무아사상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깨닫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깨닫는다는 말에는 그것까지 포함한다.”고 하실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쓰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 때문에 수없이 많은 잘못이 생겨나는 것이다.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 잘못.

깨달음에 대한 인가(認可)도 문제이다. 실제로 깨달은 선사가 없는데 누가 누구를 인가해 준다는 말인가. 또 깨달았다는 것은 행동으로 드러나고, 감화력으로, 성인(聖人)의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현실이 전혀 그렇지 못한데 참선에서의 깨달음이란 것이 성불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지 않은가.

2. 그러면 어찌해야 탐진치가 조복되는가

탐진치를 조복 받으려면 일단 육바라밀이나 8정도를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말인데? 그렇지 않다. 한국의 선종이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고 하면 6바라밀이나 8정도는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6바라밀은 너무도 기본적인 기초 교리이다. 즉, 바라밀 중에서도 <보시, 인욕, 지계>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선정, 지혜”만 닦아서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불교 교리의 가장 기초이다. 아, 물론 참된 지계(持戒)가 없는 선정수행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다 아는 얘기지만, 오늘은 지계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 이야기 하게 되면 할 말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일하게 참선만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잘못된 풍조인데, 그 근저에는 “불교가 깨닫는 종교”라고 잘못 주장하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8정도 중에서 선정만 중요하다면 어째서 “성스러운 도”가 8가지나 된다고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 하셨겠는가. 깨달음이 나쁜 것은 아니로되, <불교가 깨닫는 종교다>라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으면 다 된다”는 생각이 선종이 심어놓은 가장 나쁜 독소라는 것이다. 그 생각이 오늘날 한국불교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깨달음은 환상”이다. 어떤 깨달음? “그런 깨달음”은 환상이다.

물론 이렇게 한국불교에서 압도적으로 선종 우위의 풍토가 된 것은 이른바 60년 전에 벌어진 “정화(淨化)” 때문이기도 하다. 정화의 과정이 그리 떳떳하지 못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화 사태의 결과로 가장 큰 혜택을 누린 것이 비구승단이다. 그리그 그 결과로 오늘날 한국불교는 선종 일색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불교가 과연 깨달음 수행이라도 제대로 하는지, 그리고 종단 중진 스님들이 출가비구인지 그 문제는 차치해 두자. 그 이전에 과연 공허한, 증명되지 않는 “깨달음”이라는 이데올로기만으로 종교지도자라는 자신들만의 허상을 유지해 갈 수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승의 초기 성자들을 소승적 깨달음 수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매우 노력했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보살사상이고 이타사상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발전되어 온 불교를 모르고,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그것이 불교의 전부인양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매우 이기적인 것이고, 소승적인 것이고 대승불교가 가장 경계했던 것이다.

3. 참선할 자격

사람들은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참선을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러나 참선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6바라밀의 네 가지를 잘 수행한 사람이다. 그 네 가지란 보시, 인욕, 지계. 정진이다. 오늘날 선종 스님들은 보시 잘했나? 인욕 잘 했나? 지계 잘 했나? 그러니 그렇지 않다면 참선 할 자격도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깨닫는답시고” 앉아서 깨닫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고 셈 아닌가. 선방에 들어가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보시 인욕 지계를 잘 수행해 마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경전을 충분히 공부한 사람들만이 선방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그것이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의미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한국의 선종에서 그럴 자격 있는 사람 몇이나 되는지 상당히 의심스럽다.

깨달을 자격은 보시를 잘해야, 인욕을, 지계를 잘해야 생기는 것이다. 사회, 이웃 생각 안하고, 정치 경제에도 관심 없고, 사회의 도덕성에도 관심 없고, 이 사회의 교육문제 가정문제에도 관심 없이, 그저 참선만 한다고 깨달음이 저절로 이루어지는가? 깨달음이란 그런 게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 선종이 주장하는 깨달음, 그런 이기적인 깨달음은 근거 없는 “환상”이다. 그것은 일종의 부도수표일 뿐이다.

4. 부처가 되고 나서는?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성불(成佛)한다고도 한다.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깨달은 후의 즐거움, 그것을 선종에서는 극찬한다. 한(閑)도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도인이 한가한가? 도인이 한가해도 되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매일 놀고, 옥황상제처럼 하늘에서 선녀들과 춤추고 노셨나? 아니면 열반락에 취해서, 혹은 한없는 선정의 즐거움 속에서 노셨나?

그럼 깨닫고 나서는 뭘 해야 하는가? 당연히 보살행을 해야지. 보살행이 한가한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을 온 인도 대륙을 헤매고 다니시면서 고생하셨나? 그래서 코삼비에서 제자들이 속 썩일 때 괴로워하시고, 제바달다의 모함과 종단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도 동분서주하셨나?

그래서 부처님은 유리왕(위두다바)이 석가족을 멸망시키려고 군사를 몰고 오셨을 때 세 번이나 유리왕께 간청을 했나?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일족이 멸망하고, 석가족의 왕이 된 사촌동생 “마하나마”가 물속에 빠져 일족을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바위덩어리를 몸에 묶고 물에 빠지는 비극을 목도하셨나?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도와 불교를 마가다국의 국교로 발전시킨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그 아들 아사세 왕(아자타사투)을 달래서 조복시키기 위해서 그리도 애쓰셨나? 잘 생각해 보라. 그것이 깨달은 후 도인의 한가한 모습이던가. 그래서 당신께서는 세수 80에 지친 몸을 이끌고 고요히 열반하고자 해도 수많은 제자들의 만류를 당하셔야 했나?

부처님은 깨닫고 나셔도 여전히 바쁘셨다. 쉴 사이가 없으셨다. 깨닫고 나면 할 일을 마쳐? 할 일이 없어? 그게 바로 선불교의 독소(毒素)이다. 깨달은 후의 보살행, 이타행에 관심이 없고, 그저 깨달으면 한도인(閑道人)이 된다는 깨달음, 그런 깨달음은 매우 이기적이 깨달음이고, 매우 암적(癌的)인 깨달음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그런 깨달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들, 한국 선종이 생각하는 그런 깨달음은 없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깨달음은 환상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주위 사람들이 왜 스님들은 한 결같이 그렇게 “피둥피둥하냐”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불자로서 한없이 부끄럽다.

5. 올바른 깨달음?

그럼 어떤 깨달음이 올바른 깨달음인가?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일단 쓰면 바로 “잘못된 깨달음”으로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교는 온통 깨달음이라는 말로 채색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주장을 계속 해야만 한다. 다시 정리하자.

① 불교의 목적은 해탈, 성불이고, 인생고를 제거하는 것이다.

② 그것을 위해서는 탐진치 삼독을 조복 받아야 한다. 즉 번뇌를 조복 받아야 한다. 그것은 혜해탈과, 심해탈을 의미하고, 번뇌장과 소지장을 없애는 것이다.

③ 그리고, 깨닫는 과정보다도 깨닫고 나서의 보살행, 이타행이 더욱 중요하다.

깨닫는 과정의 중요도가 45% 라면 깨달은 후에 해야 할 일이 55% 이다.

④그런데 탐진치의 조복 중에서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것은 우치(愚癡)의 극복이다. 깨달음만으로는 욕애 (갈애), 증오심, 증애심(憎愛心) 등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것은 번뇌장의 극복으로서 가능하다. 그래서 수행(전체의 45%) 의 과정 중에서 “깨달음”이란 것은 그 1/3이다. 즉 15%이다.

⑤ 역시 6바라밀로 설명하자면, 앞의 네 가지 보시 인욕, 지계 정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깨달음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전체 수행 중에서 깨달음이 갖는 중요도는 1/3, 즉 45% 의1/3인 15%이다.

6. ‘보리도차제론’으로 설명해 보자

<보리도차제론>은 티베트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이다. 그에 의하면, 수행에는 3단계가 있다. 그것은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下士道 中士道 上士道)인데, 마치 3층 건물을 짓는 것과도 같다. 1층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고, 2층이 선정이고, 3층이 반야지혜와 보살행이다. 1층이 없이는 2층이 있을 수 없다. 지금 깨달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정을 열심히 해야 깨닫는다고 하는데 선정수행은 (즉 “깨달음” 수행은) 3층 누각에서 중간에 있는 2층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1/3이다. 그리고 그것은 1층이 없으면, (보시, 지계가 없으면) 불가능한 절름발이 2층이다. 또한 선정 수행을 열심히 한다는 것과 3층인 반야지혜를 얻고 보살행을 한다는 것과는 또 다르다. 선정수행은 단지 2층일 뿐이다. 자, 이래도 계속 “깨달음”만 주장해도 되겠는가. 그래도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다면 ‘깨달음’ 이전에 보시와 지계, 그리고 보살행을 먼저 주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김광수 /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 대학원 졸업(치의학 박사). 동국대 불교대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불교경제학적 연구〉 〈불교의 가치관을 통해본 심층생태론 비판〉 〈소비사회에 대한 불교의 역할〉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평생교육원 불교사회경제사상 담당.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불교중심 불교닷컴.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김광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한양여자대학교 &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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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암 2017-01-15 23:30:11

    깨달음이라? 부처님 말씀은 무아 무상 즉 연기법을 깨달아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연기법을 모르는 것 고통의 근본을
    모르는 것. 탐.진은 집착하지 마라는 것이다
    무아 무상인데 집착하면 괴로움이 되기
    때문이다.일어나는 욕망 망상 번뇌를 어찌
    다 끊응 수 있겠는가. 그건 죽은 것이다.
    인간으로서 희노애락등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다만 좋다고 집착하고 광신하면 괴로움리 된다는
    것이다.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집착하지 말라는 것임. 다만 일어났다 사라지는 무상. 무아임을
    알면 편안하다.이게 깨달음이다신고 | 삭제

    • 바른 깨달음 2016-11-05 20:50:44

      바른 믿음.

      마음에 기꺼이 조금이라도 모든 (존재에 대한) 유견을 집착하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을 통달할 수 없다.
      만일 청정한 신심이 견고한 마음으로
      항상 좋은 스승을 가까이하여
      일체 제불의 힘이어야 여래의 지혜에 들어갈 수 있다.
      모든 염오되고 잘못된 말들로부터 떠나서
      마음이 청정해야 항상 기꺼이 자비심으로 환희하여
      뜻과 하고자하는 의지가 광대하고
      깊은 신심이 있는 사람이
      이 법을 듣고 흔연히 기뻐하고
      보현의 모든 서원에 안주해서
      보살의 청정한 수행을 실천하여
      법계가 허공과 같음을 관찰하여야
      부처님이 행하신 곳을 알 수 있는 것이다.신고 | 삭제

      • 지혜로워져라 2016-11-05 19:57:54

        깨닫지 못하고 깨달음에 대한 열등의식의 사람 이런 소리 많이 하더라
        진정 깨닫게 되면 대안으로 눈이 밝아져 오직 연민과 자비만이 있다네신고 | 삭제

        • 그렇죠 2016-10-11 20:01:27

          선불교가 어려운 면이 있네요.
          쉬우면 누구나 다 하게요?신고 | 삭제

          • 재가불자 2016-10-09 02:01:31

            (1). “<보리도차제론>은 티베트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이다.”

            겔룩파의 창시자인 쫑카빠의 “보리도차제론”을 말하는데, 김교수는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보리도차제론”은 겔룩파에서 가장 중요한 교과서이지, 다른 종파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티벳불교에는 겔룩파, 카규파, 닝마파, 사캬파를 중심으로 여러 종파들이 있지만, 겔룩파를 제외하고 다른 종파들에서는 “보리도차제론”을 읽지도 않는다. 심지어 겔룩파를 제외한 다른 종파들의 일반신도들이나 일반승려들은 그런 책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물론, 겔룩파가 정치적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이 길기 때문에, 중국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중국에서 학문적 실력이 있는 불교도들에 의해서 많이 읽히기는 했지만, 실제로 티벳 불교 내에서는 타종파의 대부분의 승려들과 신도들이 그 존재조차 모른다. 현대에 서구에 알려지면서 외국인들에게 오히려 더 알려져 있는 현실이다.

            (2). “그에 의하면, 수행에는 3단계가 있다. 그것은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下士道 中士道 上士道)인데, 마치 3층 건물을 짓는 것과도 같다. 1층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고, 2층이 선정이고, 3층이 반야지혜와 보살행이다.”

            이 분은 “보리도차제론”을 끝까지, 아니 읽어보지도 않은 분 같다.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로 구성된 것은 맞지만, 3층(상사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이 선정과 반야고, 보살행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면, 반야지혜를 완성한 뒤에 보살행이라는 그런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상사도는 선정과 반야에 집중되어 있고, 반야는 중관사상에 대한 논증으로 점철되어 있다. 쫑카빠는 상사도 중에서 반야를 설하면서, “보살행은 논외로 서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3층이 반야지혜와 보살행이라니 제대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물론, 국내에는 제대로 된 번역조차 없다. 다시 말하면, 읽어보지도 않고서 적당히 짐작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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