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원리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
운영원리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
  • 김경호/지지협동조합 이사장
  • 승인 2018.08.1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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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제3회 정평불교포럼 발표2/김경호 지지협동조합 이사장

운영원리의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

김경호(지지협동조합 이사장)

I. 들어가며

◌ 종단이 출범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불교계는 상전벽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재산관리법 시절에는 임명장을 받은 주지가 관공서를 찾아가 신고하여야 했다. 분규사찰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재산관리인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종단과 스님들의 위상은 과거와 같지 않다. 특히 94년 개혁 이후 확연하게 달라졌다. 서의현총무원장 시절에는 종로서를 비롯한 정보기관원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며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94년 이후에는 감히 과거와 같은 행태는 더 이상 없다.

이제 총무원장실에는 장관과 국무총리가 인사를 온다. 대통령선거 즈음에는 유력후보들이 와서 허리를 조아린다. 지방 본사 주지는 물론 수말사 주지만 되어도 기관장들이 찾아온다. 검찰과 경찰에서 찾아와 도와드릴 일이 없느냐며 친근한 척을 한다. 종교지도자로서 지역사회에서 예우받는다. 이 대접에 도취된 것은 아닌가?

근대 불교의 생활상은 넉넉하지 못했다. 스님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60-70년대에는 하루 3끼를 온전히 먹을 수 있는 절이 많지 않았으며, 대웅전이 기울어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도 사찰재정으로는 보수비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스님들은 쇠락한 사찰 공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을 나서거나 대처의 신도집을 순방하여 불사를 위한 보시를 받았다는 이야기와 기록을 본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전통사찰의 경우 비록 절차상의 번거로움은 있지만 정부 지원금으로 보수공사를 할 수 있다. 60-70여개소에 달하는 관람료 사찰들은 입장료 수입이 제법 풍요롭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지원금과 관람료에 기대는 사찰을 확보하기 위한 종단정치는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13,000여명의 비구 비구니가 원하는 풍요로운 사찰은 얼마나 될까? 전통사찰 778개를 비롯 종단 소속 모든 사찰의 수는 2,500여개에 불과하다.(선학원 사찰 570여개가 법인법 파동으로 빠져나갔다.) 그 안에서도 경쟁의 대상이 되는 사찰은 150-200여개에 불과하다. 그 사찰의 대부분은 주인이 있다. 특정 문중 큰스님 문도들 사이에서 돌아가며 주지를 한다. 남는 대상은 그야말로 제한적이다. 한정된 목표를 놓고 생존을 건 무한경쟁이 지속된다.

소수 기득권의 경제상황은 풍요를 넘어 종교재벌이라고 할 만하지만 대다수는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불안정속에 빠져있다. 소문중중심의 배타적 사찰권역이 종단에 고착화되면서 기댈 반연이 없으면 해제철이 되어도 바랑을 풀 곳을 찾지 못한다.

종단이 공동체성을 상실하여 구성원들이 각자도생해야 하고, 공동체의 윤리와 도덕을 외면한 채 누구도 납득하지 못하는 처분을 반복하면서 대중의 신뢰는 상실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자신들을 ‘불교자본가’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이름 없는 아무개의 망발이 아니라 교육원장이라는 고위직 승려가 한 말이다. 그런데 율장에 등장하는 정인淨人은 돈을 만질 수 없는 스님을 대신하여 사찰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발언은 승려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포기한 발언이 아닐수 없다.

○ 1994년 개혁회의 5대 지표를 상기하자. 종단 개혁당시의 목표에는 1994년의 한시적 목표가 아니라 근현대 한국불교의 총체적, 집단적 꿈과 의지가 담겨있다. 각각의 주제가 담고 있는 키워드를 임의대로 살펴보면

- 정법종단의 구현 - 인적 청산과 제도개혁,

- 불교자주화실현 - 정권예속, 친정권 들러리 탈피, 정부지원금 의존 감소,

- 종단운영의 민주화 - 사부대중 참여, 간선제 선거인단 확대, 각종 선거제도 정비,

- 청정교단의 구현 - 범계 자정, 종권 분규 감소, 폭력, 도박, 은처, 정재 망실 처벌.

- 불교의 사회적 역할 확대 - 깨달음의 사회화운동, 복지재단 출범, 해외 구호단체, 한중일교류

그리고 3대 개혁과제는 다음과 같다.

- 불교자주화

- 제도개혁

- 인적청산

그러나 24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조계종단은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개혁당시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할 만큼 종단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답보상태다. 오히려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원인과 진단에 대해서는 백가쟁명이다.

출범한지 60년이 채 되지 못한 조계종단에 이토록 많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스스로 자정할 능력이 없음을 만천하에 보임으로써 이제는 몇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 운영구조의 설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깨진 독에 물을 부어봐야 계속 샐 뿐이다. 조계종의 핵심 운영원리와 관련한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면서 대안은 없는지 생각해본다.

○ 2017년 제35대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불교 시민사회진영과 조계종단 적폐의 본진과 그 일당들의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는 2013년 재임을 둘러싼 전쟁이 다시 점화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설정 연합군은 권력의 재생산에 성공하였고, 시민사회진영은 제도의 편파성, 기울어진 운동장, 기득권의 강고함을 확인하며 아쉽게 물러나야 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와 해석을 놓고 여러 입장이 나타났다. 그토록 많은 대중이 촛불을 들고 단식을 불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실망한 측이 있다. 또 다른 측에서는 시민사회진영의 연대가 발전된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여겨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 모든 해석은 다 타당성이 있다. 하나의 입장만이 나온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성과에 방점을 찍는 의견은 말한다. 언제까지 지는 싸움만 할 것인가. 과정에 의미 있다고 자족만 하면서 실제적인 변화는 하나도 성취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힘의 불균형을 인지한다면,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기지 못할 싸움이니까 하지 말았어야 하나? 성과지상주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지킨 도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승산이 희박했어도 옳다고 생각했기에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싸움을 지속해온 대중들이 있었기에 2018년 오늘의 힘찬 투쟁이 가능했다고 본다. 그리고 오늘의 싸움이 어떤 결론을 내던지, 불교시민사회는 한걸음 더 성숙할 것이라고 본다.

○ 쌍둥이 아빠 성월이 용주사 주지가 되면서 시작된 용주사 신도들의 분투는, 일견 자격 없는 자가 교구장이 된 것에 대한 일반불자들의 항의로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보다 근본적 물음이 담겨있다. 즉 불교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주인의 목소리는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주인의 권리행사를 가로막는 제도적 문화적 문제는 무엇인가? 신도대중을 배제한 채 소수 승려들이 모든 권리를 독점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등등.

그리고 불교시민사회가 용주사 투쟁에 결합하고 용주사의 투쟁이 조계사 앞으로 이어진 것은 이 물음이 한국불교의 현재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용주사와 총무원장을 둘러싼 종권문제는 애초부터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교시민사회의 각 단위들은 자기 바닥 대중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조직화한 편린들이다. 저마다 다른 현장에서, 각기 다른 대중들의 잠재된 생각과 욕구들을 수면위로 끌어 올려 활동의 단초를 마련하고 있다. 단위들의 다름은 총체적인 과제 앞에서 하나로 수렴된다. 바로 용주사가 교계에 던진 질문들이다. 그 질문 앞에서 각 단위들은 어떤 스펙트럼에 속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 불교에게 닥친 위기의 내용과 진단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다른 자리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오늘 발제를 통해서는 아주 근원적 질문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 어떤 불교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

- 어떻게 수행하고 공동체를 이루고 가치를 실현할 것인가

- 미래 불교는 어떠해야 하는지 상상하고

- 그 상상 속에서 각 구성원들이 어떻게 역할하고 상호 작용할 것인가

- 미래 불교의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할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으로 한국불교의 여러 모습을 조망하고, 과거와 비교하여 달라진 지점을 살피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면 불교가 달라져야 할 지점이 일부라도 보일 것으로 생각된다.

Ⅱ. 불교 전사의 이해

○ 지금의 한국불교를 멀리서 스케치하듯 바라보면 20세기 산업사회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농경사회가 보인다. 이 지점을 이해하지 않고서 현실불교를 진단하기란 어렵다. 21세기 한국불교를 규정하는 일차적 키워드는 ‘농경시대’다. 농경시대 봉건적 윤리관의 인간형이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승려사회를 관통하는 윤리적 기준은 농경사회의 가치관이다. 농경사회라는 용어가 비하적 표현이 아님에 유의했으면 좋겠다. 전근대적인 것이 모두 부정되거나 척결되어야 할 대상임은 물론 아니다. 나름의 긍정성을 갖고, 시대적 필요성에 조응했던 필연성이 있다.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규정하고 하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농경사회는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생존방식, 인간들 간의 관계, 인간사회의 복잡다양한 구조를 규정하고 강제했다. 그리고 불교가 농경사회를 천년 이상 살아오면서 불교의 구조와 그 안에 속한 인간형은 농경사회의 인간형이 되었다.

전통적 사찰문화, 불교문화가 요구하는 인간형은 농경시대 생활문화가 요구하는 인간형과 다르지 않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근면형. 자연질서에 순응하는 기다림과 체념의 정서. 유교적 서열주의와 권위에 대한 복종. 농경사회가 만들어낸 인간형은 그에 부응하는 윤리가치를 형성했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세속과 출가 생활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절에 간다고 해서 생활리듬, 경제활동방식이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서 농사짓듯 절에 가도 농사를 지었다. 의생활도 비슷했다. 주생활도 차이가 없었다. 당시사회는 오로지 토지에 기반한 생산력이 주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출가는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은 선택일 수 있었다. 지금과 전혀 다르다.

화폐경제가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교환방식도 곡물 등 물물교환이었다. 심청전에서 등장하는 심봉사의 공양미 삼백석 이야기는 당시 조선사회의 경제, 사찰경제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농경사회가 요구하는 경제구조는 사찰에도 관철되어 선종사찰의 자급자족형 경제모델로 이어졌다. 부처님 시대에도 없었고 율장에서도 허용하지 않는 선농일치, 반농반선의 윤리가 불교의 주류가치관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 교단질서도 마찬가지다. 지배권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배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함으로써 순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억불숭유를 표방한 조선왕조시대의 압도적 국가폭력을 앞에 둔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이해하자. 불교 전래시기의 사문불경왕자론 같은 기개는 드물고 유교적 효사상, 장자상속 이데올로기,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를 정립하였다. 스스로 굴종의 길로 들어선 바도 없지 않다.

이러한 국가주의 불교적 경향성은 조선왕조가 붕괴하고 승니도성출입 해제가 가져온 충격파 속에서 일부 승려가 친일을 내면화하는 등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를 위한 31본산제는 한국불교의 대중공의 전통을 파괴하여 주지 1인의 전횡을 가능케 했으며 대처식육의 파계가 한국불교의 주류가 되는 암흑기를 맞이한다. 이 대처 왜색화 불교의 청산이 해방 뒤 핵심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국불교 정체성의 회복은 농경시대, 조선시대 불교의 복사판일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이미 사회는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사찰의 승려 양성과정은 농경시대 모델이며, 사원경제는 곡물을 가져오는 신도대중에 의존하고, 수행의 깊이나 법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출가 서열이 기준이 되는 유교적 장자상속이데올로기가 관철되었다. 그럼으로써 내부적으로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온정주의가 남아있는 전 근대성과 반봉건성이 유지되고 있다.

승가에 남아있는 농경시대의 정서는 출가자들 사이에서만 유지되지 않는다. 재가불자들에게도 이 질서를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아직 농경시대의 전통이 남아있던 시절의 향수를 간직한 농촌 출신의 이촌향도 인구들에게는 이 요구가 먹혔다. 그러나 이미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탈근대를 넘어 사회질서는 재편되었다. 대가족이 핵가족이 됨을 넘어서서 해체가족, 1인가족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승가사회는 어느새 전통주의자를 넘어서 꼰대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권위적 질서의 수용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교육으로 길러진 세대는 새로운 인간관계, 새 질서를 요구한다.

○ 현대 한국불교가 직면한 비자주적 불교현실, 왜곡되고 부패한 종단문제는 통합종단 조계종 출범의 정권의존 현실에서 잉태되었다.

“조계종은 54년 5월 21일 이승만대통령 유시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정화’의 연장선에 서 있다. 불교정화는 왜색불교의 청산,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전개되어 비구측의 대처승 측 사찰 접수로 진행되었다.(때문에 불교정화라는 용어보다는 사찰정화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또 이때 밀려난 대처측에서는 이것을 ‘법난(法難)’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불교정화 이전 당시 비구승들은 변변한 수행처도 없이 이곳 저곳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반면, 대처승들은 수입 좋은 절을 차지하고 처자식을 거느린 채 가사를 돌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승만의 정화 유시도 모 사찰을 방문하던 중 절 경내에 기저귀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내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불교정화는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비구 대처 분규 과정에서 빚어진 권력과의 밀착, 삼보정재 탕진, 무자격승려가 무더기로 양산되는 등 많은 부작용 또한 있었다.“

비자주적 불교는 정부 입맛에 맞도록 관리하려는 정부 측 의도와 정부의 지원금과 권력에 기대어 내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불교정치승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강화되어왔다. 이 과정에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사적 거래가 일어났다. 정통성이 취약한 정취권력은 종교계의 지지를 빌미로 국고지원과 사법보호를 제공함으로써 서로가 만족하는 거래를 해왔다.

Ⅲ. 현 조계종단의 구성원리

○ 조계종단의 구성 기조는 대한민국 국가 구성의 미니어처다. 입법은 중앙종회, 사법은 호계원, 행정은 총무원으로 3권분립을 흉내내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소유질서를 인정한다. 사찰의 관리인인 주지는 임기동안 절대적 권리를 행사한다. 이들 권리와 운영원리는 사실 율장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평등한 승가공동체의 전통에 위배될뿐더러, 무소유에 기반한 수행자여야 할 승려를 불교자산가로 만들었다. 불교자산가가 된 승려들은 부패의 위험에 늘 노출되고 있다. 제대로 된 견제와 감시장치조차 없는데 청정함을 유지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 또한 근대 민주국가의 구성원리를 흉내내었지만 내부 원리는 비민주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성불평등이다.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의 주요 직위는 ‘비구’만이 맡을 수 있다고 명문화되어 있다. 중앙종회 81석 가운데 비구니 의석은 10석뿐이다. 호계원에는 비구니 자리가 아예 없다. 총무원의 주요 부국장 자리에 비구니 몫은 형식적으로 할애되고 있다. 지방분권을 상징하는 교구본사의 산중총회(본사주지와 종회의원, 총무원장 선거인단을 선출한다)에서 비구니는 의결권의 20%를 넘을 수 없도록 제도화되어있다.

○ 출가 2부중의 하나인 비구니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데 재가2부중의 몫이 온전히 있을 리 없다. 종단의 주요 자리에 재가불자의 자리는 없다. 종헌에서 “본종은 출가와 재가로 구성한다.”고 하였고, 종헌 제10조에 “신도는 삼귀의계, 재가5계 및 보살계를 수지하고 삼보를 호지하며 본종의 종지를 신수봉행 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제12조 “승려 및 신도의 권리 의무와 분한, 법계, 의제는 종법으로 정한다.”고 하여 신도법이 있으나 이는 종단운영의 주체로 대접하는 규정이 아니다.

○ 정화 시 형성된 종단 제도와 권력은 변화된 현재를 담아내지 못한다. 94 개혁조차도 정화모델의 연장선이었다. 지금의 종단 위기는 정화 당시 구축된 종단 질서의 변화 필요성을 확인하고 있다.

Ⅳ. 기존 질서는 변화된 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 한국불교의 어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부 위기 – 신뢰의 위기- 승풍실추, 수행명상의 설득력 감소

구조의 위기 - 비민주성 -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인가

경제 위기 – 재정프로그램(기도? 입장료 등판매)

재생산 위기 – 출가인구의 감소, 청소년 포교, 불교동아리 감소

외부 위기 – 다종교 사회 – 종교간 경쟁 격화 – 재래식 불교(농경, 음력)의 위기

종교영역 감소 – 복지, 상담 등 전문화, 탈종교화-국가 사회의 역할로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 의료 복지 등에 투자 부족. 군소 집단으로 전락

산업구조의 변화 – 산업경제와 불교의 관계성 단절(농경)

혁신의 위기 –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변명이던가 책임전가던가

수행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 과정과 결과는 동의 받는가? 부정당하지는?

기존 신자들/ 사찰의 신행을 극복할 대안이 없고

기존 불교의 한계와 오류를 설득하지 못하는 시민사회진영의 한계,

◌ 어떤 불교여야 하는가

불자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불교일까?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자로써 문화적 역할, 가족 및 전통 공동체 붕괴의 간극을 대체 정신적 역할,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영역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다.

또한 승려들은 가르치는 역할, 모범을 보이는 역할, 수행하는 역할, 자비봉사하는 역할을 넘어서서 앞으로는 어떤 역할을 필요로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불교 구조여야 하는가 - 종단 구조를 권력의 형성과 배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반 종교수요자의 입장에서 다시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 불교 경제규모에 대한 일반인들의 착시현상은 문화재관람료사찰에서 비롯한다. 불교와 관련 없는 이들이 전통불교와 만나는 첫 자리는 입장료를 납부하는 자리인 경우가 많다. 수많은 이들에게 돈을 징수하는 불교의 모습은, 노동하지 않고 수익을 얻는 부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실상 관람료를 징수하는 사찰은 전국에 걸쳐 64개소에 불과하다. 조계종 소속 3천여 개 사찰가운데 98%는 이 수익과 무관하다. 다만 관람료사찰을 둘러싼 욕은 공평하게 1/n로 나누어 받는다.

○ 종교권력의 부패는 재정문제에서 시작한다. 종단 혼미의 모든 출발점은 재정을 둘러싼 다툼으로 재정이 우량한 핵심 사찰 150-200여개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다.(2천 5백여 개라는 종단소속 사찰 가운데 공찰은 1천개가 되지 못한다. 나머지는 민법으로 소유권이 보장되는 사설사암이다. 778개의 전통사찰 중 대다수가 속한 공찰을 둘러싼 다툼이다.) 기득권이 된 승려들은, 확보한 이권을 놓지 않기 위해 종단 정치에 올인하게 된다. 개인의 축재만이 아니라 일가 권속, 문중의 번영이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 주요 사찰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종단정치와 폭력분규, 매관매직이 벌어진다. 한 번 확보한 이권은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적폐세력은 민족 문화유산의 사유화, 국고보조금의 쌈지돈화, 조폭 패거리 문화로 종단을 통치하는 비민주적 종단운영을 행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종단의 자정기능은 상실되며, 음행, 음주, 폭력, 도박, 돈선거 등 각종 지탄받는 범죄는 반복 발생한다. 급기야는 언론자유 침해 등 헌법질서를 부정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아예 없다.

사회적 상식과 충돌하는 몰상식, 근근대적 퇴행, 반봉건적 내부모순, 권력을 독점한 자들 간에 벌어지는 부패의 사슬, 공법기능의 편파적 적용, 공적 기구와 자산의 사유화, 자기권리를 자각하고 말하는 대중에 행하는 강폭한 협박은 모두 이 기득권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에서 출발한다.

○ 청정교단은 가능한가? 그런 불교는 없다.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청정한 교단은 존재해본 적이 없다. 석가모니부처님도 못하신 일이다. 청정성 등은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만 절대적 가치기준이 된다면 이를 충족할 이는 거의 없다.

지금의 종단 안에서 발생하는 부패와 타락, 승풍실추 등의 제 문제에 대해 승가 공동체는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만한 규모의 압도적 조직규모를, 자산규모를 감당해본적도 운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전통불교의 질서는 출가자 사이의 갈등을 조정했을 뿐 재가불자까지를 포괄하는, 사회적 문제와 조응하는 부분에서는 역할해 본 적이 없다. 율장은 출가자들의 질서일 뿐이다. 그 질서로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 자기가 경험한, 혹은 상상한 작은 범주에서 각기 불교를 인식하지만, 지금의 현전승가는 역사상 한 번도 마주해보지 못한 광범위한 권역이다, 새로운 문명으로 인해 즉시적 정보교환이 가능하며 교통발달로 세계가 일일생활권이다. 변화된 세계에서 모두를 만족시킬 새로운 운영원리가 필요할 때다. 더욱이 출가자들만의 폐쇄적 승원모델은 이제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렵다. 사부대중의 눈앞에 늘 노출되는 시대에서는 새로운 운영원리가 필요하다.

○ 나아가 교학적, 이상적, 관념적 사방승가 개념은 역사와 사회를 반영하고 그 안에서 물질적으로 생존해야 하는 개인과 집단임을 망각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크게 불교와 비불교를 가르는 기준은 물론 존재한다. 그 기준으로 불교의 범주를 고정할 수는 있지만 보다 큰 틀에서 보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한국 불교의 풍경은 못난 놈도 어우러져 온 역사다. 그런데 정화운동을 거치면서 불교 아닌 것들에 대해 가혹한 기준을 들이대고 배제의 원칙으로 질서를 구축했다. 이 기준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저것 다 지우고 나면 한국불교라 여겨왔던 풍경이, 역사성과 문화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다양성이 모여 한국불교라는 큰 풍경을 형성한다. 때로는 아웃사이더조차 불교의 한 영역이었다. 반승반속, 비승비속의 경계는 물론 땡초라 불리는 파계승들도, 급기야는 대처까지도 불교의 큰 풍경이다. 단청 범패 등 문화전통을 계승한 이들 가운데 비록 대처나 식육, 음주 등의 문화가 있더라도 그들을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른바 고승들의 무애행조차도 파격으로 수용하는 불교전통이라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조계종단의 청정비구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독신청정의 기본 축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변주를 어떻게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지적이다.

○ 종단 운영의 핵심은 결국 인사 재정이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를 제도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기준은 결국 율장정신이라 일컫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문제는, 이천 오백년 전 율장은 시대와 공간이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 지금의 한국불교는 사찰조차 유지 관리가 어렵다. 2천 5백여 개 사찰 가운데 주지 임명을 하지 못하는 사찰이 500개 이상이 된다. 인구의 도시집중이 가속화되면서 이 추세는 더욱 심화된다. 신도시는 사찰이 없고 산중사찰은 신도가 없다.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대로 사찰의 유지가 가능한가? 그럼에도 계속 창건할 필요가 있나?

○ 더 나아가, 현 사찰 재정수입의 구조는 크게 기도수입과 재수입(49재와 천도재), 초파일 등 특별 명절수입이 주종이다. 세계최대나 동양최대를 말하던 대형불사 수입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그 수입의 상당부분은 시설관리비용으로 나가고 인건비로 소진된다. 사찰의 연간 전기료는 일년 수입의 1-2개월 치에 해당하고, 난방과 차량운행을 위한 에너지 비용 또한 그에 버금간다. 즉 목탁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2-4개월치가 그런 식으로 소진된다면 미래불교를 위한 재투자 비용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경제가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는 어떤 방안도 사상누각이다. 부족한 부분을 국고보조금에 의존하는 방식도 한계다. 지금과 같은 신도 이탈이 계속된다면, 불교의 신뢰가 계속 하락한다면 미래를 이야기할 것도 없이 곧 말라죽을 지경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있는가?

Ⅴ. 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 비구 1부중에 독점된 종단 권력의 해체, 사부대중의 공동관리가 필요하다. 종단 위기상황 때마다 종단권력의 재편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이른바 혁신기구가 아니라 100년을 대비하는 기구를 사부대중의 긴 호흡으로 해야 한다. 문제는 100인대중공사, 백년대계위원회 등으로 좋은 이름이 오염되었다는 점이다. 권력기구의 보호막으로 기능하는 위장기구를 척결하고, 사부대중이 동참하는 21세기의 열린 결집을 통해 종단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승려는 수행 중심으로, 관리는 재가 참여로 종단 미래를 공동으로 책임져나가야 한다.

○ 대중공의가 파괴된 자본주의적 재산관리인인 사찰주지의 독점적 권한을 해체. 가톨릭 모델처럼 최소한 교구차원의 공동경제체제 추진 필요. 주요 전통사찰의 수익을 사유화할 수 있는 현 구조는 중단되어야 하며, 전체 공동체를 위한 공동경비로 이용되어야 한다.

○ 교구 재획정이 필요. 종단 성립 뒤 수십 년이 경과하면서 한국사회 지형이 크게 변화, 교구별로 인구와 경제규모의 차이가 심화, 수도권을 비롯한 광역시는 무주공산, 야생의 각축장이 됨.

○ 이에 덧붙여, 1700여년의 문화유산인 전통사찰과 불교문화재는 불교인만의 것일 수 없다. 온 국민의, 나아가 온 인류에게 전해지는 유산이다. 이를 관리한 내셔널트러스트 같은 기관을 설립하여 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소수 권승들의 사유재산화를 방지하여야 한다.

○ 그러므로, 778개의 전통사찰을 포함한 공찰의 관리권을 ‘소속단체 장의 동의’이라는 애매한 법률규정을 통해 비구승가에 독점한 현재의 사찰관리와 재산에 관한 국가법령을 개폐하는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 이는 수행승을 사찰의 관리 운영으로부터 강제로 분리시키며,

- 재산관리인이라는 명목으로 무제한의 재산처분권까지 부여하는 현행 권한을 정지시키며,

- 사부대중이 새로이 평등한 관리운영의 주체가 될 법적 지위를 부여하며,

- 불교재산의 처분에 대한 비토권을 개인이 아닌 승가공동체에 부여함으로써 재산의 망실을 방지하고,

- 전통사찰의 재정수익을 개인의 수중에 두지 않고 공적 기금화하여 불교발전에 사용.,

- 사설사암은 현재의 민법규정을 통해 소유권과 관리권이 보장되므로 검토의 대상이 아님.

○ 민주적 대중공의 전통의 파괴와 자본주의 질서 편입 - 사찰주지 1인에게 권력집중

– 사찰의 사유재산화/ 대중공의 실종(현전승가 사라짐)/ 재정 불투명성

- 율장과 사회법의 괴리/ 지킬수 없는 율과, 사회법의 사각지대 종교

○ 현재 불교 공동체라 말하는 조계종단은 전혀 종교적일 수 없는 세속적 다툼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제도의 문제를 말하기도 하고 부패한 인간의 문제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비구 1부중의 독점적 종단운영의 한계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 자자·포살·대중공사·승려대회·칠불쇠법의 전통이 있는 불교는 당연히 모든 구성원이 주인 되는 민주적 대중공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출발점은 종단의 최고책임자인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일이다.

○ 총무원장의 지위는 출가이부중의 자치대표권자로 하여 재가이부중과 차이를 둘 필요는 있다. 그러나 종단의 운영(교단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수도 있다)은 출재가 사부대중의 공동운영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 출가중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재가중은 준비가 되어있는지 고민스럽다. 굴종적 재가신행을 극복할 재가 내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수동적이고 비자주적 신행이 계속되는 한 재가자 또한 불교적폐의 재생산에 기여할 수도 있다. 현 승단의 부패에는 재가자의 책임도 일부 있다. 앞으로 승단의 자율성을 보장하되 재가 부분의 적극적 동참과 대표성 확보 방안 등이 논의되어야 한다.

Ⅵ. 미래불교를 준비하기 위해

◌ 미래불교를 준비하려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담대한 그랜드디자인을 그려야 한다. 기존의 종단, 기존의 불교관련 법의 틀에 우겨 넣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청정치 못한 파계승들을 정리해내기 위해 호계원까지 재가가 진출해야 할까? 이는 출가자치를 훼손하는 제안으로 출가의 자존심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승려 자치영역의 인정 필요하고 재가 운영 참여의 범위와 한계를 숙고해야 한다. 즉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지켜온 불교 역사성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이 고민지점은 향후 종단을 사부대중이 공동운영을 한다고 해도 승려 비토권을 도입하자는 제안으로 연결된다.

이미 출재가 이분법은 혼미해졌다. 승가가 독점적으로 유지해왔던 전통계승의 영역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재가 영역으로 넘어왔다. 미술, 음식 등 생활문화, 교학 연구까지도 이미 재가의 영역이다. 현재 출가중은 불교의례의 전문가이며 수행 실참자로서 권위만 남아있다. 그러나 수행영역 또한 위빠사나, 아바타 수행등 외래종 수입수행 프로그램에 밀리는 추세다.

◌ 더욱이 불교교단은 지속가능성의 위기에 봉착했다. 신도 300만 이탈은 너무 충격이 커서 현실감이 없으나, 출가자의 지속적 감소는 지방강원, 중앙승가대학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다. 또한 출가자의 고령화는 생계형 출가자의 증가로 이어져 출가연령제한 완화에 대한 재고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그렇다면 미래 불교는 누가 주인으로 책임질 수 있을까? 공동화되는 출가구조가? 신뢰를 상실해가는 재가대중이?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미래 불교는 출재가의 구분 없이 하나의 대승교도로 돌파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3차 산업혁명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근대성, 반봉건성과 계급사회적 인식이 여전하다. 사찰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보라. 고령의 여성노동자들이 비인격적 대우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전근대적 교육과 폐쇄적 승원생활에 길들여진 승려들은 전통적 영역에서의 계승은 인정받을지 몰라도 사회 전반의 발전방향을 선도하는 지도력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근대적 인식이 부재하며 각종 영역에서 문화지체가 빚어지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농경사회 인간형을 넘어서서 산업화 정보화 시대의 불교적 인간형, 윤리적 인간의 형성은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 합리성과 상식이 결여된 종단 운영, 특히 사법질서는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근대 선각자들인 만암스님은 교육, 가람불사 등 지역 복지, 항일 민족운동에 종사했고 운허 스님은 독립운동, 교육, 한글역경 등에서 우뚝했다. 이밖에도 만해, 용성 등등 큰 스승들의 안목과 실천은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청정비구승단 건설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거목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요즘 지도급 승려의 안목은 전시대 고승들보다 훨씬 떨어진다.

◌ 종교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어떤 불교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자.

어떻게 수행하고 공동체를 이루고 가치를 실현할 것인가.

미래 불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상상하고 그 상상 속에서 각 구성원들이 어떻게 역할하고 상호 작용하는지,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권력이 형성되고 작동하는지를 상상해야 한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종교란 무엇인가/ 누가 종사하는가/ 어떻게 기능하는가./ 재생산되는가 등에 대한 논의를 활발발하게 열어가야 한다.

○ 불교 시민사회운동은 변화하고 있다. 종단 적폐를 청산하고 청정종단을 구현하자는 2018년 운동에서 눈에 띄는 변화라면, 재가만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스스로 자정 못하는 승단에게 희망을 두어야겠느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지지를 받고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일상적으로 시민사회진영이라기 보다는 신행조직으로 분류되던 부분들이 투쟁대열에 동참하면서 보다 더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 하지만 조계종단을 부정하고 외면하면서, 조계종단에 승적을 가진 승려들과 연대가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의 미래가 한국불교의 미래라는 명제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조계종에 아무리 실망했다고 하여도, 출가제도와 승려교육, 역사와 문화를 계승 담지하는 조계종의 역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불교 종단이 수백 개를 헤아려도 조계종을 빼고 나면 한국불교는 거의 남지 않는다. 조계종의 그늘 안에만 있으면 보이지 않으나 조계종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오히려 조계종의 소중함이 보인다.

◌ 한국불교의 역동성, 이웃종교, 시민사회와 갈등없이 융합하는 넓은 포용성은 불교 개혁운동이 종교개혁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남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1700년 한국불교의 문화유산은 온 국민의 것이고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그 안에서 불교전통의 계승, 유지, 보존자는 누구이며 누가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을 담당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할 때다.

◌ 붇다의 가르침 안에 모든 답이 있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유전자조작, 낙태 등 생명윤리만이 아니라 당장 실생활에서 MSG(글루탐산나트륨)를 먹어도 되는지,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입장은, 핵에너지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 것인지 불교 지식인사회의 담론조차 아직 맹아상태다. 현대의 생활 속에 부딪치는 작은 제 문제들이 오히려 더 현실적 문제다. 이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지성의 여행을 불교 지식인사회가 열어야 한다.

◌ 어쩌면 대웅전 의례공간과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요사가 함께 있는 사찰이라는 형식이 혁신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사찰 없이도 신행이 가능한 신행모델을 불자들은 개발하여야 하고, 절 없이 생활 가능한 승려들의 생존방식이 고민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미래불교의 생존 방향이 나온다. 총무원 권력구조, 총무원장 선출방식 등의 거대 담론 이전에 이러한 미시적 담론의 활성화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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