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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모여 이야기하고 화합하면 후퇴 않는다"

기사승인 2018.10.31  14: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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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전과 함께한 인도성지순례] (10) 베살리의 번영과 중각강당(重閣講堂)

2018년 1월 4일 오전 원담 스님과 진주선원이 함께 하는 인도성지 순례팀은 대림정사로 향했습니다. 바이샬리(베살리) 부처님사리탑에서 대림정사까지는 4킬로미터 거리로서 차로 10분가량 걸립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가장 부유하고 가장 번영 하던 도시였으나 현재 도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베살리는 초기경전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16대국 마하자나빠다(Mahājanapadā)

초기경전에서 묘사된 베살리는 풍요로운 도시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마하자나빠다(Mahājanapadā)라 불리는 16대국이 있었습니다. 나라 이름을 보면 까시(Kāsī), 꼬살라(Kosala), 앙가(Anga), 마가다(Magadha), 밧지(Vajji), 말라(Mallā), 쩨띠야(Cetiya), 밤사(Vamsā), 꾸루(Kuru), 빤짤라(Pañcāla), 맛짜(Macchā), 수라세나(Sūrasena), 앗사까(Assaka), 아반띠(Avantī), 간다라(Gandhāra), 깜보자(Kamboja) 이렇게 열여섯 나라입니다. 이 중에 베살리는 밧지에 있었습니다.

밧지는 마가다와 갠지스 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열여섯 대국 중에서 가장 강성한 마가다의 위협아래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공화제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화제에 대하여 부처님은 “밧지 족이 자주 모이고 자주 만나는 한, 아난다여, 밧지족에게는 번영만 기대되지 퇴전은 기대되지 않는다.”(D16)라며 칭찬했습니다.

밧지족을 칭찬한 부처님

부처님이 밧지족을 칭찬한 것은 일곱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납바나경’에 설명되어 있는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는 1) 자주 모이고 자주 만나는 것, 2) 화합하는 것, 3) 공인된 것을 수용하는 것, 4) 노인들을 공경하는 것, 5) 폭력으로 제압하지 않는 것, 6) 탑묘에 공양하는 것, 7) 거룩한 임이 밧지에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곱 가지 이유를 들어 밧지족은 번영하지 퇴전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 난 후 마가다 왕 아자타삿뚜의 간계에 의하여 밧지는 마가다국에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밧지족의 수도 베살리는 번영을 구가하는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그것은 정치체제가 가장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대국들과는 달리 돌아가면서 통치하는 공화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가 ‘자주 모이고 자주 만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소통’입니다.

베살리의 번영에 대하여

공화정은 왕정과 달리 소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 모이고 화합해야 합니다. 특히 자주 모인다는 것은 사방팔방에서 얻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모든 정보를 오픈하여 토론으로 결정하는 민주적 방식입니다. 서로 화합한다는 것은 화합하여 일어섬을 말합니다.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내가 먼저 내가 먼저’하며 간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구나 어른을 공경하는 윤리도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 베살리의 번영에 대하여 <율장대품>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도층인사]
“폐하, 베살리 시가 번영하고 풍요로워 인구가 많고 사람이 붐비고 먹을 것이 많고, 거기에는 칠천칠백개의 전루와 칠천칠백개의 중각과 칠천칠백개의 공원과 칠천칠백개의 연못이 있습니다. 기녀 암바빨리가 아름답고 보기에 좋고 세련된 최상의 미모를 갖추고 춤과 노래와 연주에 능숙한데, 원하는 사람마다 모여들자, 하룻밤에 오십 금을 벌고 있고, 그 때문에 베살리는 더욱 번창하고 있습니다. 폐하, 우리들도 기녀를 유치하면 좋겠습니다.”(Vin.I.268, 율장대품)

라자가하 시의 한 지도층 인사가 베살리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마가다 국왕 빔비사라 왕에게 베살리의 번영에 대하여 위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풍요로운 베살리에 대하여 칠천칠백개의 전루 등으로 설명했는데 기녀 암바빨리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습니다. <테라가타(장로게경)>에는 기녀 암바빨리와 빔비사라 왕의 로멘스에 대한 이야기가 주석에 인연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빔비사라왕은 베살리의 번영과 최고의 미녀 암바빨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하여 <테라가타> 64번 게송(Thag.64) 인연담에 따르면 “빔비싸라왕은 젊었을 때에 암바빨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듣고, 애욕이 생겨나 여러 수행원들을 데리고 모종의 변장을 하고 베살리 시로 들어가 하룻밤을 그녀의 거처에서 보냈다. 그때 그는 그녀의 태에 입태했다.” (Thag.64, 비말라 꼰당냐 인연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기녀 암바빨리와 로맨스를 하여 태어난 아기가 나중에 장로가 된 비말라 꼰당냐(vimala koṇḍañña)존자입니다.

대림정사(大林精舍) 가는 길에

순례팀은 대림정사(大林精舍)로 향했습니다. 전세버스에서 내려 대림정사로 가는 길에 본 인도는 매우 궁핍해 보였습니다. 경전에서와 같이 풍요롭고 번영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인도의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입니다.

   
▲ 대림정사 가는 길.

대림정사 입구는 허름합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잘 가꾸어진 유적공원입니다. 들판 가운데 자리 잡은 대림정사에는 아난다 스투파가 있고 아소까 석주가 있습니다. 샨티라 불리는 커다란 연못이 있고 붉은 벽돌로 되어 있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유적지를 보면 이곳이 그 옛날 풍요롭고 번영했던 베살리를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베살리 풍요와 번영의 상징 중각강당(重閣講堂)

대림정사는 초기경전에서 꾸따가라살라(Kūtāgārasālā)라 합니다. 베살리 인근 마하바나(Mahāvana: 大林)안에 있는 홀을 말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한때 세존께서 베살리 시의 마하 숲에 있는 꾸따가라 강당에 계셨다.”(D6)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하 숲은 ‘Mahāvana를 번역한 것으로 한역으로 대림(大林)이라 합니다. 꾸따가라 강당은 Kūtāgārasālā 번역어로서 한역으로 중각강당(重閣講堂)이라고도 합니다.

빠알리어 꾸따가라(Kūtāgāra)는 ‘a pinnacle building’이라는 뜻으로 작은 뾰족탑이 있는 건물을 뜻합니다. 빠알리어 살라(sālā)는 홀(Hall)을 뜻합니다. 따라서 꾸따가라살라(Kūtāgārasālā)는 뽀족탑이 있는 너른 홀을 뜻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서까래를 결합하여 기둥들 위에 중각강당과 같은 천궁모양의 높은 누각을 만들어 그것으로 인해 승원전체가 꾸따가라 강당, 즉 중각강당(重閣講堂)이라고 불렸다.”(Smv.300)라고 합니다.

   
▲ 대림정사 아소까 석주.

중각강당은 베살리의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부처님 당시 베살리에는 칠천칠백개의 전루와 칠천칠백개의 중각과 칠천칠백개의 공원과 칠천칠백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풍요와 번영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마하바나에 있었던 꾸따가라살라, 즉 중각강당이었을 것입니다.

당대 최고 논사 삿짜까(Saccaka)

부처님은 중각강당에서 6안거를 보냈습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부처님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Nandaka (S.v.389), Sunakkhatta (M.ii.252), Bhaddiya (A.ii.190f), Sālha and Abhaya (A.ii.200)’가 소개 되어 있는데, 그때 당시 명사들이었습니다. 자이나교도 삿짜까(Saccaka)와의 대론(對論)도 중각강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맛지마니까야>에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과 ‘삿짜까에 대한 큰 경(M36)’이 있습니다. 자이나교도 삿짜까는 베살리 시에 살고 있었는데 논쟁을 좋아하고 박학다식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삿짜까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자신과 토론하여 논쟁하면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전율하고 감동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삿짜까는 베살리 시내를 산책하다가 앗사지 존자가 멀리서 오는 것을 봅니다. 그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데 무엇인지 물어 봅니다. 이에 앗사지 존자는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 지각은 무상하다. 형성은 무상하다. 의식은 무상하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에는 자아가 없다. 느낌에는 자아가 없다. 지각에는 자아가 없다. 형성에는 자아가 없다. 의식에는 자아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 일체의 것들에는 자아가 없다.”(M35)라며 무아의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앗사지 존자는 자신만만해 하는 자이나교도 삿짜까에게 부처님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합니다. 삿짜까가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입니다.

부처님과 삿짜까의 대론(對論)

마침내 부처님과 삿짜까의 대론이 열렸습니다. 장소는 꾸따가라살라(重閣講堂)가 있는 마하바나(大林)입니다. 이 대론을 지켜보기 위하여 릿차비 인들도 오백 명이 모였습니다. 자신만만해 하는 삿짜까는 “마치 힘 센 사람이 숫양을 그 긴 머리채를 잡아 이리로 끌어당기고 저리로 끌어당기고 이리저리 돌리듯, 나는 논쟁에서 수행자 고따마를 이리로 끌어당기고 저리로 끌어당기고 이리저리 돌릴 것입니다.”(M35)라며 대론에서 승리를 자신했습니다. 이에 릿차비 인들은 누가 이길 것인지에 대하여 서로 말했습니다.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하 숲에서 대론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과 삿짜까의 대론은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과 ‘삿짜까에 대한 큰 경(M36)’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서는 무아에 대한 것이고, ‘삿짜까에 대한 큰 경(M36)’에서는 고행에 대한 것입니다. 영혼을 인정하는 자이나교에서는 고행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 논사 삿짜까는 자신만만했습니다. 그 누구와 대론해도 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말을 하면 기둥도 떨며 전율하고 감동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삿짜까의 유아론에 대하여 무아의 가르침으로 부수어 버립니다.

부처님은 삿짜까와 문답식으로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삿짜까가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 즉 오온이 자아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이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합니다.”(M35)라 했습니다. 이 말은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물질 등 오온이 자아가 아닌 것에 대하여 문답식으로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삿짜까는 부처님과 문답식 토론에서 자신이 믿고 있는 견해가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답변을 하지 못하고 침묵한 채 앉아 있었으나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악기베싸나여, 자 해명해 보십시오. 그대는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 할 때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입니다.”(M35)라고 말씀 했습니다.

토론은 질문 하고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그런데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더 이상 토론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삿짜까가 그랬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서도 시인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 삿짜까의 머리 위에 금강저가 보였습니다. 대론을 지켜보고 있던 야차 바지라빠니가 금강저를 들고 나타나서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했는데 답변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지게 할 것이다.”라며 공중에 서서 말했습니다.

삿짜까는 야차 바지라빠니의 금강저를 보고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라며 물질부터 물어 보았습니다. 이에 삿짜까는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로 “존자 고따마여,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답했습니다.

삿짜까는 마침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삿짜까는 “존자 고따마여, 우리가 존자 고따마와 대론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으로 무례하고 참으로 무모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일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라며 말합니다.

자야망갈라가타(Jayamaṅgala Gāthā), 승리와 축복의 게송

부처님은 삿짜까와의 대론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이나교와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그날 마하바나에서는 릿차비 인 오백 명이 이 대론을 지켜보았습니다. 당대 최고 논사 삿짜까를 무아의 가르침으로 제압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승리는 ‘자야망갈라가타(Jayamaṅgala Gāthā)’에서 게송으로도 전해져 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6번 게송이 그것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만한 삿짜까가
진리를 무시하고
진리를 벗어난 논쟁에 깃발을 들고
맹목적으로 뛰어들었을 때
성자들의 제왕은 지혜의 불을
밝혀 섭수했사오니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그대에게) 임하소서.”

‘자야망갈라가타’는 한역으로 ‘길상승리게(吉祥勝利偈)’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승리와 축복의 게송’이라 합니다. 모두 아홉 개로 이루어진 게송으로 여덟 가지에 대하여 부처님의 승리와 축복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홉 번째 게송은 유통분이라 볼 수 있는데 “이 부처님의 승리의 축복을 나타내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여 닥쳐오는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로서 해탈과 열반의 지복을 얻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야망갈라가타’는 테라와다 불교의 대표적인 수호경입니다. 초기경전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게송입니다. 각종 행사에 ‘통과의례’ 게송으로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축가로 불리고 집들이나 개업식 등에서 독송되는 수호경입니다. 이는 각 게송마다 후렴구가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그대에게) 임하소서. (Taṃ tejasā bhavatu Me(te) jaya-maṅgalāni)”라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중각강당(重閣講堂)에 대하여

베살리 마하바나(大林)에 꾸따가라살라(重閣講堂) 유적지가 있습니다. 유적지를 보면 온통 붉은 벽돌의 무더기가 이곳저곳에 있습니다. 한군데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커다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각강당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단일 건물입니다.

   
▲ 중각강당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유적.

중각강당은 기둥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가운데 커다란 홀이 있고 중층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부처님의 향실(Gandha-kuti)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의 기둥들이 뾰족한 박공형식의 지붕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홀은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놓여있고 동쪽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홀 전체를 꾸따라가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기둥들 위에 중각강당과 같은 천궁모양의 높은 누각을 만들어 그것으로 인해 승원전체가 꾸따가라 강당, 즉 중각강당(重閣講堂)이라고 불렸다.”(Smv.300)라 했습니다.

주석에 설명되어 있는 중각강당 규모는 매우 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유적지에서 본 중각강당 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앉을 정도로 매우 큽니다.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을 보면 “니간타 교도인 삿짜까는 오백 명의 릿차비 인들에 둘러싸여 마하 숲의 꾸따가라 강당으로 왔다.”라 했는데, 최소한 오백 명 이상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난다 스투파에서 예경을 하고

순례자들은 아난다 스투파에서 예경했습니다. 빠알리어로 오계와 삼보예찬을 하고 베살리와 관련 있는 보배의 경(Sn.2.1)을 독송했습니다. 예경이 끝난 후에는 아난다 스투파를 세 번 돌았습니다. 짧은 일정으로 인하여 충분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지에서 공기를 마셨습니다. 책에서 본 것이나 TV에서 본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이곳에서 실제로 부처님이 살았고 그 유적 또한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 아난다 스투파에서 경전을 독송하는 불자들.

성지순례를 하면서 놀라게 된 것은 이천오백 년 전의 유적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유적지가 대도시에 있었다면 개발로 인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불교의 성지는 비록 적벽돌 무더기뿐이지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베살리에서 본 대림정사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사자후를 토하는 듯 한 아소까 석주

대림정사에는 아소까 석주가 서 있습니다. 석주 위에 사자형상이 올려졌습니다. 불교성지에서 아소까 석주는 잘리고 부서져서 완전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놀랍게도 베살리에서 본 아소까 석주는 마치 부처님이 사자후를 토하는 듯 건립 당시 그대로 모습으로 당당하게 있습니다.

   
▲ 아난다 수투파와 아소까 석주.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이병욱 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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