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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든 원로승려들의 교훈과 경책

기사승인 2018.11.08  1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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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석암대율사의 원융살림과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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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부산 내원정사에서 국내최대규모의 템플스테이겸 국제힐링센터의 준공법회가 있었다. 총무원장 본말사주지 종회의원 원로의원과  정치인 시장 기관장들,수천명의 신도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구덕산아래 양명하고 아늑한 내원정사는 천막법당으로 시작해  창건49년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신도들과 수백만 부산경남 시민들과 외국인들까지도 포함 정신적인 안식처로  명실상부하게 마음수련의 대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승려와 불자들의 자부심이 될 만한 대작불사다.

산과 계곡만 있던 곳을 개발해 그 땅에 대가람과 수련장까지 갖추는데 평생을 바친 내원정사의 주지이며 원로의원인 정련(正緣)스님은 나와 어릴때 같이 지낸 선배로서 스승인 석암대율사의 큰 원력과 가르침의 영향력을 깊이 받았다.

원효대사 창건의 신라고찰인 당감동 선암사에서 평생을 참선과 염불, 기도와 계율 대중외호와 신도교화에 힘썼던 석암스님은 만공선사의 사형으로 '서서 빗자루에 기대어 열반하신  전설적인 해월선사'의 직계 제자였다.

특히 선암사는 50년대 6.25동란이후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선객들과 피난승려들로 몹씨 붐볐고 범어사 다음으로 대중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석암스님은 밤낮 사찰을 관리하고 대중들을 외호하는 일에 정진을 아끼지 않았다 그 어려운 시기에 스님은 염불기도에 금강경독경 계율전수, 대중법문과  농사짓고 심지어 공양간에 가서 대중음식도 즐겨 만드신 분이다.

아마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겠으나 큰스님이라면 으례히 큰절 받고 극진한 존경을 받으며 설법이나 하면 되는 요즘의 고승들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수많은 제자들과 신도들이 석암스님의 인자한 인품과 때로는 서릿발같은 계율정신을 기억하고 있지만 주지, 정연스님도 스승의 엄격한 정신과 원력, 원융살림으로 오랫동안 대작불사를 이룩할 수 있었다.

평생 사찰건립과 교육 포교 복지불사에 남다른 능력을 갖춘 정련스님과 다르게 나는 오랜 세월동안 전국의 선지식을 참방해 배우고 사회참여라는 실천불교를 했으나 스승 석암스님의 큰뜻에는 다같이 부합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어린시절 선암사에서 기초를 닦고 본사인 범어사와 전국사찰에서 경학과 조계종 초대종정, 동산조실과 은사인 선교율의 대종장인 엄성호스님을 위시해서  전설적인 도인인 설봉선사와 운허 전강 고봉 탄허 서옹 청담 향곡 자운 고암율사 경봉 서암 범행 일타 지효 고산 벽안 벽암 행원 월하 능가대종사등 헤아릴수  없이 많은 스승들을 만났고 가르침을 받았다.

70년대에는 서울 경기도와 전국각지를 방랑하면서 승려와 신도교육 포교에 힘쓰고 시대의 아픔을 지켜봤다 80년초부터 군사독재의 만행을 보면서 글로써 고발하고 실천적인 사회참여를 주도 한것이 어느듯 35년이다.

그러니까 정연스님은 40여년간 주로 도시사찰건립과 신도교육, 복지사업과 포교원장 동대이사장으로서 화려한 제도권불교에 뛰어난 성공적인 수완을 보였다면 나는 눈에 보이지않는 비제도권 재야불교에 치중했으니 극과극인 셈이다.

여러번 사찰건립과 비용을 마련할 기회가 많았으나 나의 길이 아니었던지 사회개혁과 종단개혁이라는 목표에만 마음이 가 있었다. 법정스님처럼 여려운 불교를 현대인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용어를 만들고 해석한 일이며 많은 글을 쓰고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일,짧은 기간이나마 승려 신도들을 가르친 일들이 헛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80년 후반부터 중국 티베트 인도 동남아를 배낭여행하면서 역사문화를 알린 일, 더 넓은 동북아지역을 다니고 연변대교수들과 교류하며 연구와 조선족대학생들을 가르친 일 등은 적지않는 보람이다. 인접한 두만강 압록강변의 고구려 발해역사탐방과 북한을 새롭게 깨닫고 인식한 것도 내삶의 큰부분이 아닐수 없다. 
 
오현 조실과 백담사 만해마을의 자취 
 
올해 나와 인연있는 네분의 원로승려들이 입적했다 1월달에 도선사조실 현성대종사가 입적했다 어릴때 같이 석암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분으로 후에 도선사에서 은사인 청담스님을 모시고 교육과 포교 복지불사에 공이 많은 분이었다.

5월에는 설악산조실이며 원로의원인 무산오현 선사가 입적했다 오현 스님으로 널리 불린 그는 일찍이 김천에서 떨어진 절에서 시문학수업을 할때 나는 김천청암사와 수도암에서 3년동안 수학했다 7080년초에는 인사동에서 법보와 불교신문 편집국장으로 나와 자주 만났고 그후 세월이 흘러 5,6공이 물러간뒤 설악산의 맹주로 자리잡고 백담사중건과 만해상제정과 만해마을조성을 하면서 근 20년간을 교우했다.

오현 스님은 매우 개성이 강한 분이었다 자유분방해 승속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대했으며 원로문인들이 그러하듯 밥보다 곡차를 즐기면서 항상 소탈한 언행과 미소를 띠고 자비심으로 대함으로서 백담사와 만해마을을 한국의 문인예술가들의 장으로 만들었다.

한국기독교의 대표원로 강원룡목사를 초빙해 만해대상을 수여하는가 하면 종단에서 승려로 제대로 대접안하는 국민멘토 법륜스님에게도 만해대상을 줬다. 역대 만해대상과 유심상에 종교를 가리지 않다보니 많은 숫자의 카톨릭문인신자들이 상을 받고 며칠씩 묵고 초청강의도 했다  김남조 유안진 박완서 박경리 신달자 오세영 유자효씨등 유명한 카톨릭문인이 휩쓸었고 상대적으로 불교문인은 소외됐다고 가끔 말이 나왔다. 오현 님은 생전에 나와 농담으로  만해 님의 시는 오현 님이 계승자요  논설은 내가 만해스님을 계승했다고 자주 언급하고 내가 논설칼럼을 너무 잘쓴다고 측근에게 말할 정도였다.

오현 정휴 중광 인환 호진스님등을 비롯한 여러 문인 학자승려들과 인연이 깊은 가톨릭원로시인 구상선생께서는 80년대에 나온 나의 첫 불교사회평론집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시고 만난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서문을 기꺼이 써주셨다 나의 글솜씨와  문장은 한때 자랑이고 긍지였으나 요새처럼 인문학이 홀대받는 시기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불교언론논설과 주필외에는 대접받는  공직을 맡아 본적 없는 절집안에서 지금까지 붙어 있어면서 자유로이 필봉을 휘두르고 누가 대접이나 알아주지도 않는 현실개혁이나 불교개혁, 한반도평화같은 비현실적인 담론을 펴내는 일에는 아직도 열정이 남아 있어 도움이 된다.
 
아마도 오현스님같은 분은 앞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불의를 보고 추상같으면서  악인마저 포용하는 넓고 깊은 마음이며 아무리 높고 고귀한 신분의 이라도 굽실거리지 않고 평소처럼 대하고 때로는  사자후같은 고함을 지르다가도 약자를 위해 눈물을 훔치는 자비와 지혜의 보살행을 실천한 분이었다. 오현 님은 설악산도량을 일신시키고 수도장을 혁신시킨 중창주로서 불자와 국민들의 살아있는 역사를 창조했다.

8월의 한더위에는 지리산 서암정사의 거대한  석굴사찰을 창건하고 평생 수행자로 산 구한원응선사가 입적했다 .원응스님은 석암스님의 맏제자로서 법맥과 율맥을 이었으나 한번도 외부에 알리거나 활동을 하지 않고 오직 6.25때 빨치산의 근거지로 아군에 의해 전소된 한국선불교의 본산인 벽송사를 중건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해서 선원을 복구했다.

원응 스님은 부친이 만공 스님의 문하에서 참선공부를 한 선근인연이 있었고 젊은 시절 몸이 약해 부산 선암사와 해인사, 그리고 지리산에서 평생 참선과 기도염불, 어려운 불사를 끝내 해내고 또 사경의 1인자로 법화경 화엄경사경 전시회를 국내와 해외에서 개최해 절찬을 받았다.

원응 스님은  지리산오지인 한국 첫번째의  칠선계곡 수행처에서 정진해 밖으로의 활동이 적어 잘 알려진 분이 아니나 수행자로 철저해 조계종의 세속화의 오염된 풍토에 비하면 한점의 백옥같은 분이다.

마지막으로 불과 보름전에 입적하신 호암인환 스님은 원산에서 피난와서 석암 스님의 제자로 인연맺으며 동국대와 동경대에서 수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카나다선원건립과 동국대에서 제자를 양성한 대학승이다. 인환 스님도 스승의 영향으로 계율사상을 전공한 학승이었다.

말수가 적고 입가에 늘 미소를 띠는 인환 스님은 천진한 모습과는 달리 강의나 법문때는 다르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선지식이다 내가 아쉬움을 느낀다면 너무 학구적이다보니 대중들과의 소통은 적었다는 점이다.

근현대 조계종의 대표적인 율사는 동산조실과 자운대율사 석암대율사로 비구계는 이분들의 소관이었다 요즘처럼 단일계단이 아닌 금강계단은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만 있었고 거기에서만 비구 ,
비구니계를 설했다.

네 분 원로 현성 오현 원응 인환 스님은 모두 석암 스님과 인연있는 제자로 세분은 직접지도를 받았고 오현 스님은 비구계를 받은 간접적인 제자라 할 수 있다. 
 
조계종의 계율과 정법은 죽었는가 
 
각각 특색 있는 네 분의 원로와 달리 다수의 원로와 종단지도자들은 종단의 기강이 무너지고 언론에 간부승려들의 부패와 비리가 보도돼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파계승려들을 지지한다. 그렇게 얻어지는 이득이 크다고 할수 있겠다 눈앞의 이익을 보고 정의와 양심을 저버린 종단중진승려들의 작태는 한심하나 그것이 오늘 조계종의 현실이다.
종헌종법을 짓밟고 계를 어기며 사회법조차 두려워 하지 않는 그들에게 금과옥조같은 경전의 말이나 옛조사의 경책을 들어도 마이동풍일 것이다.

며칠전의 불교심포지움에서 혜총 스님과 불교학자들의 말처럼 범계승들의 일탈은 정상적인 수행과 스승의 지도를 거친 득도의 과정이 아닌, 문중과 종단파벌 인맥에 줄만 대면 돈과 감투의 출세가 보장되는데 뭣때문에 힘든 수행과 정법을 따르겠는가.

한반도평화를 위한 국가정책이 남북한과 사강의 관계및 국제정세를 변화시키고 있다 조계종단도 하루속히 종단혁신을 통해 세상에 맞는 대중불교를 창출해야 한다. 수개월전 새총무원장이 들어서고 새종회가 구성됐어도 달라진 것이 없고 구태의연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라는 여론처럼 현종단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른다 각종간부들도 친자승 불교광장이라는 정치권승이 대부분이다 .

개혁파승려들이나 재가불자의 활동이 소강상태이지만 언제 다시 반개혁파들을 청산할 불길이 치솟을지 모른다. 적폐청산은 정치 사회뿐만 아니라 종교계에도 적용되는 시대의 과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소암 (승려시인 .한국불교역사문제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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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 승려시인 dasan25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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