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두려워마라
죽음을 두려워마라
  • 배길몽
  • 승인 2019.02.04 17:33
  • 댓글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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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배길몽의 ‘지피지기’ 24

서울 인사동에 가면 유명한 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명함을 보면 대부분 이상한 단체의 회장이나 총재로 되어있다. 필자가 거기서 대한민국에서 유명하다고 소문난 도인들을 거의 다 만나봤다. 그런데 그들의 대부분은 사기꾼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수준들이었다. 도인들 중에는 자신이 미륵보살, 재림예수, 단군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생에 왕이나 공주 혹은 유명한 스님이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그런데 산에서 만난 도인들은 대체로 순수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도가 뭐냐고 물어보면 도는 말로 가르쳐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천기를 잘못 누설하면 화를 입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천기를 함부로 외부에 밝힐 수 없다고 얼버무린다.

필자도 산중의 수행자들처럼 그동안 수행에서 깨달은 것(천기?)들을 모두 세상에 밝혀야 할지 일부만 밝혀야 할지 많은 시간을 두고 고민했다. 천기를 누설해서 화를 입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진실이라고 해도 인류 평화에 도움이 안 된다면 굳이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탐구에 의하면 모든 종교가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순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여러 종교 중에서 불교가 가장 과학적이며 철학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필자가 어느 스님으로부터 많은 은덕을 입었으므로 필자도 그분이 믿고 따르는 불교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불교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 필자가 깨달은 것 중에서 일부를 불교 언론에 기고하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수많은 승려들이 비리를 저질러도 그것은 승려 개인의 문제이며 자신들의 종교 교리(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여전히 불교를 믿는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모순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이미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독교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큰 장점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모순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이미 알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모순에 대한 외부의 공격에는 면역이 돼있어서 치명적인 공격이 아니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모순이 많지만 그래도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한 현상들이 기독교 안에서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은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며 신의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오직 마누라만 모르고 자기 남편이 착하다고 믿고 있는 것과 같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교리)을 믿고 따른다. 그런데 그 가르침에 모순이 있다면 불교라는 거대한 탑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존재가 믿음의 대상이므로 하나님의 부존재가 증명되기 전에는 교리에 약간의 모순이 있다 하더라도 믿음을 유지할 수 있지만 불교는 부처님의 존재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교리)이 믿음의 대상인데 가르침에 모순이 있다면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역으로 믿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존재는 확실해서 의심의 대상이 아니므로 반대로 믿음의 대상도 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아무도 부처님의 존재를 믿으라고 하지 않으며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만 잘 따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면 불교는 신앙의 대상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므로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흔히들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기독교의 창조사상이 깔려있다. 인간은 절대자의 특별한 애정으로 만들어진 고귀한 존재이므로 인간의 가치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사상을 기초로 만들어진 현행법에 살인죄는 있지만 살생죄는 없다. 그런데 모든 생명은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따라 가치가 매겨져야 한다. 전력이 모두 소모된 축전지가 무슨 가치가 있으며 노쇠해서 작동이 안 되는 기계에 무슨 가치가 남아 있겠는가? 한 생명이 이룩한 업적은 칭찬받고 존경받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의 업적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생명의 연장은 의미가 없다.

보석은 아무런 업적도 없지만 존재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는다. 더러는 생명도 그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한 가문이나 나라에 커다란 업적을 쌓았다면 그가 더 이상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마치 골동품이나 문화재가 실생활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귀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비생산적인 생명도 귀하게 여겨질 수 있다. 보석처럼 존재만으로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면 소모된 축전지나 노쇠한 기계를 미련 없이 폐기하듯이 인간의 생명도 자연스럽게 폐기돼야한다.

일반 동식물은 자립능력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죽는다. 그런데 인간만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쓴다. 생명체는 스스로 섭생을 영위할 능력이 없어지면 죽는 것이 옳다. 일시적인 질환이나 사고로 신체기능이 저하됐다면 치료해보는 것이 좋겠으나 전반적인 신체기능의 저하나 장기적인 회복 불능의 상태에서도 억지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며 살아있는 자나 돌보는 자에게 모두 불행한 일이다.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축하하면서 왜 죽는 것은 축하할 일이 아닐까?  냉정하게 말하면, 태어남은 생의 질곡 속으로 진입하는 고난의 시작이므로 축하할 일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죽음은 영원한 안식의 시작이므로 진정으로 축하할 일이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게 살았다면 그의 영예로운 인생의 마감은 축하해야할 일이고 또 어떤 사람이 악하게 살았다면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죽음은 더더욱 축하할 일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드는 것과 같이 죽음도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사람들이 무리하게 생명을 유지하려는 것은 내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태어남과 죽음은 자연이 순환하는 한 과정이며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시험을 염려할 필요가 없듯이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죽음(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면, 잠이 들려고 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혹은 현기증이 일어나면 모두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는데 죽기 전에도 그와 유사하므로 생물학적인 죽음의 고통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작은 벌레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들이 삶의 보람을 느끼거나 열심히 잘 살아서 천국에 가려고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죽지 않고 계속 살려고 애를 쓴다. 야생의 짐승들도 추위와 굶주림에 고생하면서도 안 죽으려고 하는데 왜 그럴까?

모든 생물은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설계돼있고 그래서 오래 살려고 노력하므로 종족이 유지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이 되지 않는 알 수 없는 미래의 변화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며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우주의 윤회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며 탄생 이전의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탄생 이전의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사망 이후의 상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 성인들의 공통된 가르침 이다.

그런데 모든 성인들이 죽음에 초연했는데 기독교의 성경을 보면 예수는 죽음을 매우 두려워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예수가 자신에게서 약간의 초능력이 나타나므로 자아도취에 빠져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 지도자)라고 생각하고(마태복음 16:20, 누가복음 9:20~21) 용감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그전에는 죽음이 두려워 예루살렘에 가지도 못했다. 요한복음 7:1, 11:54, 12:36). 그리고 어떤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믿고 담대했었는데 기적이 나타나지 않음을 깨닫고 절망하면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나님이 자신을 죽도록 방치하는 것을 처절하게 원망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때서야 자신이 하나임의 아들이 아닌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부활 이후부터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고 또 물위를 걷는 기적이 나온다. 풍랑을 잠재운 기적보다 더 의미 있게 우리가 인식해야할 것은 풍랑에도 불구하고 호수를 건너야하는 급한 사정이 예수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세례요한이 헤롯왕에게 잡혀서 죽었다는 보고를 제자들로부터 받은 예수가 아무런 말도 없이 배를 타고 한적한 곳(빈 들, 갈릴리 호수 건너 벳새다 지방)으로 갔다고 했는데, 평소에 말(설교)이 많던 예수가 말이 없었다는 것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고, 호수를 건너갔다는 것은 자기도 붙잡혀서 죽을 것을 염려해서 호수 건너로 도망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기록에서 예수가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예수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며 여자가 난 자 중에서 최고라고 자신이 칭찬한 세례요한이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제자들로부터 보고를 받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에게는 신적인 능력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증거다. 일반적으로 성직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반인들보다 적다. 그러나 예수는 성직자가 아니라 정치가였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던 것이다.

그리고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예수가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었다는 기적에 대해서 설명해보겠다. 예수는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죽였으므로 요한의 수제자인 자신도 죽일 것을 염려해서 호수 건너편으로 피신해서 머물면서 자신의 안전을 점검하려고 제자들을 먼저 다시 갈릴리로 보내고 자기는 몰래 혼자 뒤따라 와서 주변 동정을 살피다가 별탈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제자들 앞에 나타났는데 제자들은 예수가 그날 호수를 건너온 것으로 오해하고 예수에게 그날은 호수를 건너오는 배가 없었는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예수는 자신이 며칠 전에 몰래 와서 숨어있었던 것이 창피해서 사실을 감추고 농담처럼 물위로 걸어서 왔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때는 제자들도 농담으로 생각했으나 예수가 부활한 기적(?)을 본 후에 그것이 진짜였을 거라고 믿고 마치 자기들이 직접 예수가 물위를 걷는 것을 본 것처럼 이야기를 꾸민 것이며, 한 술 더 떠서 자기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갈 때도 예수가 풍랑을 잠재웠다고 이야기를 추가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호수를 건널 때에 풍랑이 일어나자 예수가 겁이 나서 기도를 했을 것이고 그 후에 풍랑이 멈췄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것은 예수의 기도나 능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은, 예수가 도망갈 때는 급해서 풍랑이 이는데도 제자들과 같이 배를 타고 가고 다시 돌아올 때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혼자서 몰래 따로 왔다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는 죽음에 초연하는 도인이나 성직자가 아니라 죽음을 몹시 두려워한 평범한 인간(정치가)이었다는 것이다.

옳은 가치와 삶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담대히 앞으로 나가라. 그리고 죽음이 닥치더라도 두려워마라. 내세가 있다면 그대는 그대가 노력한 만큼 필히 보상받을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분은 공정할 것이므로 성실히 노력한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자비)은 진정한 선행(사랑과 자비가 필요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할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책이므로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심판할 때에는 하나님을 잘 믿었는가 아니면 안 믿었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얼마나 훌륭하게 살았는가만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역사상 인간에게 믿음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인간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올림픽이나 월드컵 개막식에 공식적으로 하늘에서 한번만 나타났다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었을 터인데 그러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들의 믿음(종교적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에 관심이 있었다면 예수처럼 일부지역 사람들만 알도록 슬며시 몰래 지구를 다녀갈 것이 아니라 태양이 떠오르듯이 모든 인류가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수많은 천사들을 대동하고 하늘로부터 공개적인 방법으로 지구를 방문했을 것이다. 옛날에 임금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변복을 하고 암행을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변복을 하는 이유는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기 위함도 있지만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다. 임금의 옷을 입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누가 자기를 암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가 두려워서 인간으로 변신해서 몰래 지구를 방문했겠는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입장은 부모의 입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부모에게 문안 인사를 많이 하는 것보다 자식이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잘 처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전지전능하며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들로부터 존경이나 문안을 받아야 기뻐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실제로 있다면 묵묵히 지상천국을 이루려고 노력한 사람은 당연히 하늘천국에도 갈 수 있을 것이므로 내세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가지지 마라.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참고로 말하면, 원죄, 은혜, 예정 등과 같은 기독교의 교리들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신도들을 겁주어서 자신들을 섬기게 하려고 만들어 낸 것이며 예수는 그런 것을 언급한 적도 없다. 구원의 가능성은 오직 자신의 노력에 달렸으며 예정된 구원은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예수의 유명한 비유 설교들이 많다. 씨 뿌리는 비유는, 어느 땅에나 똑같은 씨가 뿌려지는 것이며 싹이 나고 자람은 땅(사람)에 달렸다는 것이고, 결혼식의 비유는, 초청장(기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예복(행함)을 갖추지 않으면 초청장만으로는 예식장(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도, 주어진 능력(달란트)을 열심히 실천해야 상(천국)을 받는다는 것이고, 또 무화과의 비유는, 잎(시작; 믿음)이 아니라 열매(결과; 행함)를 보고 판단한다는 것으로서, 이런 모든 비유들의 공통점은 구원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의 행함(순종; 결과)을 보고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들은 잃어버린 양과 탕자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사랑만 강조하는데 그 속에 숨어있는 더욱 중요한 뜻은 하느님이 길 잃은 양이나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므로 구원은 하느님의 택함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노력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에 따르면 불신을 굳이 죄라고 한다니까 그 점에 대해서도  짚어보자. 사도행전 17:30에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느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라고 했고 또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들이 모르고 하는 짓이니까 용서해주소서’ 라고 한 것은 무지로부터 발생하는 죄는 용서될 수 있으므로 예수를 몰라서 믿지 않은 것은 면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전도를 받고도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도를 받고서도 안 믿었다는 것은 안 믿겨서 못 믿었다는 것인데, 어떤 사실을 상대가 믿게 하려면 주장하는 자가 상대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거나 아니면 주장하는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해야한다. 상대가 안 믿는 것을 믿게 만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도자의 책임이다. 상대가 복음을 불신하는 이유는 전도자가 종교인으로서 모범적인 행동을 못 보였거나 혹은 복음의 증거(표적)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불신의 책임은 불신자가 아니라 전도자에게 있는 것이므로 몰라서 못 믿은 것뿐만 아니라 안 믿겨서 안 믿은 것도 모두 면책이 가능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일부 종파가 주장하는 예정설에 의하면 안 믿은 것은 하느님이 그 사람을 택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며 불신자의 결정이나 책임이 아니다.

만약에 천국이 있다면 지상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은 모두 하늘천국에도 갈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 지상천국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가지 못하는 하늘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천당(극락)이 아니라 악마의 소굴이므로 그곳에 가지 못함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열심히 그리고 아름답게 살다가 때가 되면 편안하게 떠나라. 지구에 소풍 와서 즐겁게 지내다가 돌아간다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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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achar200 2022-12-03 01:20:42
제발 기독교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공부 좀 하고 하세요. 예수 그리스도도 성경의 말씀도 비판하겠다면 전체를 다 읽어보고 비교 대조하면서 하시고요, 님이 말씀하시는 주제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는 혹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제대로 검토 좀 하고 하세요. 유치하고 맹목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네요. 정신 승리로 행복하실 줄은 모르겠지만, 바로 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 제발 본인 바램대로 기독교나 성경을 왜곡하지 마시고, 제대로 공부 좀 하세요.

2019-02-13 17:14:01
깨달은것 중에서 인류평화에 도움이 않되는것이 있다? 흠 !!!
그게 뭔지 궁금하고요, 또 그게 뭔지 감이 전혀 오지 않네요
길몽님은 천기누설이란 깨달음을 얻고서 세상살아가는 이치를 깨달았으니
제자를 두셔야 겠어요 불교에선 말하자면 벽지불이잔아요?
저를 수제자로 삼으십시요

비워라 2019-02-12 11:23:21
한심하다는 것은 너의 모자란 판단이고
그 판단에 의해 대상이 한심하게 될 리가 있을까?
미친 개가 짖는 것은 미친개의 행동이고
미친 개가 짖는다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미칠까?
헛생각을 버무린다고 참된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런 잡스런 관념을 다 비워야 한다.

꼴값? 2019-02-12 10:00:12
꼴값은 너도 마찬가지다
너도 네 생각을 붙들고 떠들며 한심하게 꼴값하다 죽는거야.
제 꼬라지는 못보는 한심한 길몽아!
죽음을 성찰했다면 위 기고문처럼 한심한 소린 안한다.

가슴에서 나온 네 것이 없잖아. 남들이 먼저 말한걸 컨닝했잖아. 거기에 네 생각좀 섞어서, 요즘 이런사람들 많타.ㅋㅋ

배길몽이 2019-02-12 09:47:02
깨달은 것 중에서 일부만 공개한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인류 평화에 도움이 안되는 내용이니까 밝히기를 보류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직 제대로 된 천기 누설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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