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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포럼]조선시대 국가정책에 따른 사찰 운영의 변화

기사승인 2019.04.15  1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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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회 정평포럼, 사찰 재정의 개혁방안을 탐색하다

 

조선시대 국가정책에 따른 사찰 운영의 변화

이종수(순천대)

Ⅰ. 머리말

불교는 종교로서 사상일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역사가 녹아들어있는 문화적 현상이기도 하다. 각 지역의 시대에 따른 정치와 경제가 불교문화의 특징을 만들어내었다. 한국 불교 역시 정치와 경제에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권력자에게 때로는 숭상되고 때로는 탄압받기도 했지만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도들이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자 하는 신앙심으로 그 전통을 지켜왔고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전통이 되었다.

불교 문화전통 가운데 전근대 시대 사원경제는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정치적 결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사찰의 전지와 노비에 대한 국가의 허여와 불허는 승려의 노동에 영향을 미친다. 가령 인도에서는 출가자의 노동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자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으로 내몰리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원경제와 관련해서는 시대별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사원경제는 억불의 과정이자 실체로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아직까지 ‘억불’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불교에 대한 정치적 억압에 대해서는 조선전기의 일부 왕조를 제외하면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교가 조선 건국 이래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퇴락하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해답을 사원경제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본고는 기존의 시대별 사원경제 연구 성과를 참고하되 관련 자료를 시기별로 재구성할 것이다.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여 권력자의 불교 정책 변화가 사원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경제적 흐름을 통해 사원경제를 재해석해 볼 것이다. 아울러 출가 수행자의 본분사(本分事)와 말분사(末分事)가 어떻게 전도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Ⅱ. 신라·고려시대 사찰 경제

출가자는 수행과 설법이 본분의 일이므로 사원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본분사(本分事)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사원경영의 주체자는 출가자였다. 사찰 주지는 사원 경영의 책임자로서, 국왕으로부터 수조지(收租地)를 사급(賜給)받거나 귀족이나 백성들로부터 현물을 시주받아 운영하였다. 사찰을 운영함에 있어서 전근대 사회의 경제적 기반은 대체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였다.

신라·고려시대 사원전은 주로 국왕의 전지 사급을 통해 생겨났으며 귀족이나 일반민의 기진(寄進)으로 발생·확대되었다. 귀족들이 자신의 집을 희사(喜捨)하여 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이고, 또 국왕이 사찰에 재화나 전지의 시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는 것으로 볼 때 귀족의 보시가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전지가 없는 사찰은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정도였다. 고려 성종대 중생사 주지 성태(性泰)가 절의 향화(香火)를 이어갈 사원전이 없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했던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사원전과 더불어 사찰의 경제적 기반은 노비였다. 그런데 삼국시대 이래 고려 중기까지 사원노비는 일반 노비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에 “법흥왕이 폐지된 곳을 들어 절을 세웠는데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가사를 입었으며 궁중의 친척들을 보시하여 절의 노비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 사원노비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삼국유사󰡕를 편찬한 13세기 말 고려시대의 주석에서 “절의 종은 지금까지도 왕손이라고 한다. 그 후 태종무열왕 때 재상 김양도가 불법을 믿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어 화보와 연보라고 했는데, 몸을 희사하여 이 절의 종이 되었다. 또 역신(逆臣) 모척의 가족을 이 절의 노예로 삼았는데, 이 두 가족의 후손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라고 한 것이다. 즉 고려시대까지 경주김씨와 김해김씨 가문에서 사비(寺婢) 혹은 사예(寺隷)라는 의미로 사원의 노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혹 사원노비 출신으로서 입신출세(立身出世)한 사람도 있었다. 고려 중기 명종대 무신(武臣)으로서 실권자였던 이의민은 어머니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 비(婢)였고, 고려 말 공민왕대 실권자였던 신돈 역시 어머니가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의 비(婢)였다. 고려시대는 ‘입천자 수모지법(立賤者 隨母之法)’, 즉 어머니가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였으므로 이의민과 신돈은 사원노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태종대의 상소이긴 하지만 “승려들은 본래 기강이 없어서 노비를 사역시키는 것이 대개는 가볍고 헐 합니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사원노비는 일반 노비보다 훨씬 자유로웠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갈수록 사원노비는 점차 일반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 되어갔던 것 같다. 가령 󰡔고려사󰡕 열전 「노국대장공주」에서 “운암사에 전 2,240결과 노비 46구를 시주하여 명복의 비용에 쓰게 하였다.”라고 한 것이라든가, 「광자대사비명」에서 “동리산으로 돌아가게 하고 도의 수상에게 명하여 전결과 노비를 지급하여 향적에 공양하도록 하였다.”라고 한 것은 공노비(公奴婢)를 사원노비로 전환시킨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공양왕 3년 낭사(郞)舍에서 올린 상소 중에 “그 매매한 사람을 절에 헌납하는 폐단을 모두 금지하여 다스리십시오.”라고 한 것과 공양왕 4년에 “자기의 노비를 가지고 권세가에게 증여하거나 사찰이나 신사에 시주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한다.”라고 한 것은 사원노비의 신분이 고려 말에 이르러 일반 노비와 다를 바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중국에서 당나라 말기 이후 승려의 노동에 대해 새로운 개념이 생겨난다. 선종에서 수행자의 마음이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한 순간에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관념이 확산되고, 또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기본으로 하는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생겨난다. 중국에서 출가자의 노동에 대한 관념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로부터 출가자가 생산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생산 활동을 주도한 출가자는 바로 사찰의 주지였다.

고려시대 주지직은 사원의 재정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덕망으로 사중 승려를 통솔하는 명예로운 자리였지만, 주지의 타락은 사원 경제의 확대와 함께 심화된다. 고려시대에는 원칙적으로 토지사유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일부 귀족의 공음전이나 사찰의 사원전은 세습이 가능했다. 귀족이나 농민들이 자신의 사유지를 확보하기 위해 명목상 사찰에 기진하는 경우가 생겨났으므로 형식적으로는 사찰 소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진자(寄進者)의 소유였다. 이런 경우 토지 산출물의 일부는 사찰이 소유하게 됨으로써 사찰로서도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기진 받은 사원전을 확대해갔다. 또한 사찰은 토지의 매입(買入)과 점탈(占奪)을 통해 사원전을 확대해갔다. 충렬왕이 내린 전지에 “여러 궁원과 사사에서 한전을 차지하고자 하였고, 국가에서도 또한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으로 사패하였다. 그런데 사패를 빙자하여, 주인이 있어 토지대장에 수록되어 있는 토지라고 하더라도 모두 아울러 빼앗는다.”라고 하였고, 충선왕이 내린 교서에 “사원 및 재와 초제를 지내는 곳에서 양반의 전지를 탈점하여 함부로 사패를 받아서 농장으로 삼고 있다. 지금부터는 담당자가 조사하여 다스리고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일반 농민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전지도 탈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찰은 대토지 소유의 주범이 되어 갔고, 주지가 그 토지를 관리했다. 그래서 “사사의 주지를 공의하는데 대부분 뇌물로써 과분하게 얻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출가자의 생산 활동 참여에서 주목되는 존재가 수원승도(隨院僧徒)이다. 수원승도는 사원의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윤관(尹瓘)은 “국내외 사원은 모두 수원승도가 있어서 항상 노역을 맡아 하였는데 군현의 거주민들과 같다.”라고 하였다. 당시 사원전의 경작이라든가 여러 잡역을 담당했던 부류는 수원승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승려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승도(僧徒)’라는 표현으로 볼 때 수행승과 구별되는 지위가 낮은 승려이거나 절에 소속되어 일하는 재가자들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인종대에 “불교의 사찰은 나라 안팎에 두루 있는데 역을 피해 도망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편히 사는 자가 몇 천만이 되는 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문종대에 “지금 역을 피한 무리들이 사문이라 칭하며 재화를 불려 생계를 경영하거나 농업과 축산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국역을 피해 승려가 된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기사는 수원승도의 존재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한편 사원에서는 직접 금융과 상업 행위를 하여 수익을 창출하기도 했다. 금융 행위와 관련하여 <고려사절요>에서 “보는 방언이다. 시주받은 돈과 곡식으로 그 본전은 남겨두고 이자를 취하여 영구히 이용하는 까닭에 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보(寶)를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고리대금으로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그리고 주류(酒類)를 판매하기도 했는데, 현종대에 “승니의 술 빚는 일을 금한다.”라든가, “양주에서 아뢰기를, ‘장의사·삼천사·청연사 등의 승려들이 술 빚는 것을 금지한 법령을 어기고 쌀 360여 석을 사용하였으니, 청하건대 율에 의거하여 그 죄를 처단하십시오.’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고, 또 “음양회의소에서 아뢰기를, ‘근래에 승려와 속인의 잡류들이 모여 무리를 이루어 만불향도라고 칭하면서 혹은 염불하고 독경하며 괴이하고 허황된 짓을 하고, 혹은 내외의 사찰에서 승려들이 술과 파를 팔며…”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소금을 매매하기도 했다. “본국은 여러 궁원과 사원, 나아가 권세가가 사사로이 소금가마를 두고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나라의 경비를 무엇으로 충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기록을 통해 소금을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 불교계의 타락을 목격한 김전과 정사척의 상소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난다. “근래에 무식한 승도가 창업한 뜻을 살피지 않고 백성과 토지의 산물을 거두어 들여 자신들이 경영하여, 위로는 부처를 공양하지 않고 아래로는 승려들을 기르지 않고 있습니다. 아! 그 무리들이 스스로 불법을 망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불교계의 타락은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척되기에 이르렀다.

   
▲ 순천대 이종수 교수.

Ⅲ. 조선전기 국가정책과 사찰 경제

1391년(공양왕 3) 5월에 실시된 과전법은 조선 개국을 준비하는 실질적 대규모 전제 개혁이었다. 이때 사원전은 규정된 결수에 과부족이 있는 것은 원래 규정대로 복구하고, 사원에 누구도 시납할 수 없으며, 승니의 사전(私田)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로써 조선 개국 초 사원전은 고려시대에 규정된 각 사원의 원래 결수만을 면세전(免稅田)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1397년(태조 6) 7월에 장경사(長慶寺)의 승려 정의(定宜)가 법손임을 자처하면서 경상도 자화사(慈化寺)의 자산 소유권을 주장하여 시비가 벌어지자 태조는 불교의 폐습을 고쳐야 한다면서 도당에 명하여 전국 사원의 전지와 노비의 수를 추고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 보고는 훗날 사원전의 정비와 사원노비를 속공할 때 기초 자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억불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던 태종대에 종파의 축소 및 사원전과 사원노비의 정리가 단행된다. 1400년(태종 1)에는 대사헌 유관(柳觀)의 상소와 서운관(書雲觀)의 건의로 사원의 면세전을 축소하려다 태상왕 이성계의 반대로 실패하였지만, 태상왕의 붕어와 무학대사의 입적 이후 1405년(태종 5) 금산사와 와룡사 주지의 간음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1406) 3월 11개 종파 242사의 전지와 노비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속공하였다. 즉 조계종·총지종 70사, 천태소자종·천태법사종 43사, 화엄종·도문종 430사, 자은종 36사, 중도종·신인종 30사, 시흥종 10사, 남산종 10사 등 총 11종 242사의 면세전·노비·상주승(常住僧)이 정해졌다.

<태종 6년 3월 면세전·노비·상주승>

   
▲ 태종 6년 3월 면세전·노비·상주승

그러나 태종은 회암사·표훈사·유점사는 “도에 뜻이 있어 승려들이 모이는 곳이니, 예외로 함이 가하다.(有志其道 僧徒之所聚 可於例外)”라 하여 전지 100결과 노비 50구를 각각 추가 지급하였고, 또 “정한 숫자 외의 寺社도 헤아려 시지 1~2결을 주라(定數外寺社 亦量給柴地一二結)”고 하여 정수 외의 사찰에 대해 예외적으로 시지를 지급하기도 했다.

위 표로 볼 때, 당시 토지와 노비의 지급률은 2:1이었으며 거승(居僧) 1인당 노비 1구씩 지급한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읍외 각사의 노비 지급수를 30구로 평균하여 계산하면 최소 7,000 ~ 8,000구 정도 된다. 그 외의 사원노비는 양민으로 전환하거나 속공하였다. 속공된 사원노비는 대부분 전농시에 소속시켰고, 일부를 군기감·내자시·내섬시·예빈시·복흥고 등에 분속시켰는데 그 수가 8,600구 정도였다고 한다. 태종은 이듬해 1407년 12월에 승려들의 원구지심(怨咎之心)을 염려하여 242사의 각 읍내 자복사 88사를 산수승처(山水勝處)의 명찰로 교체하기도 하였으나 불교 억제의 기조는 유지되었다.

세종은 즉위한 이듬해(1419) 11월에 회암사와 진관사 승려들의 노비 강간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스승이 제자에게 물려주던 법손노비(法孫奴婢)와 정업원의 노비를 제외하고 모든 사찰의 노비를 혁거하였다. 그리고 1421년(세종 3) 3월 조계승 원목(圓穆)과 청민(淸敏) 등의 법손노비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법손노비마저 모두 속공하고 그들의 노자(奴子)는 각종도회소(各宗都會所)에 분배하였으며, 그 후 1424년(세종 6) 4월에 태종대에 7개 종파로 축소하여 공인했던 것을 다시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했으며, 승정(僧政)을 담당했던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양종의 도회소를 서울에 두었다. 선종(흥천사)과 교종(흥덕사)에 각각 18사를 배정하고 상주승으로 선종 1,970명과 교종 1,800명을 인정하였으며, 전지는 선종 4,250결과 교종 3,700결을 배정하였다. 이로써 총 36寺 3,770명 7,950결이 공인되었다. 물론 여기서의 36사는 각 지역을 관리하는 본산(本山)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외의 사원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1448년(세종 30) 11월에는 정업원을 혁파하면서 그에 소속되었던 노비와 양종도회소의 노비마저도 모두 혁거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원노비와 관련된 기록은 계속 이어진다.

호불 군주 세조는 기존 36사의 전지에 더하여 복천사·원각사·상원사·낙산사 등에 전지와 노비를 사급하기도 했다. 1457년(세조 3)에 정업원을 부활시켜 전지 100결과 노비 30구를 지급하였으며, 이듬해에는 70구를 가급(加給)하였고, 1460년(세조 6)에는 정업원 노비로서 전농시에 이속되었던 100구를 돌려주기도 했다. 또 복천사(福泉寺)에 전지 200결과 노비 30구를 주었으며, 원각사에 수소노(修掃奴) 30구를 지급하고, 낙산사에도 노비를 지급하였다. 1471년(성종 2) 사원 가운데 전지를 받은 곳이 43곳 8,300여 결에 이른다고 하였고, 1478년에는 토지를 가진 대찰이 43곳 9,910여 결이고 세는 2,600여 곡(斛)에 이른다고 하였다.

성종대에도 사원에 대한 전지와 노비 지급이 지속되었다. 봉선사에 노비 40구를 지급하고, 유점사·봉선사·정인사·낙산사·상원사의 노비 잡역을 감하였다. 그리고 광평대군의 부인 신씨가 전지 70여결과 노비 730여구를 사찰에 시납하려 했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시납노비를 줄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1472년(성종 3)에는 피역(避役) 승려 수가 정치쟁점화 되면서 억불책이 재개되어 승려 자격증인 도첩(度牒)의 신규 발급이 중단되고 피역 승려를 환속시켜 군역에 충당케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은 “승려 또한 백성이므로 모두 없앨 수 없고 선왕이 창건한 절도 일시에 철거할 수 없다.”고 하여 전면적 폐불을 단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세조대에 입안된 도승법이 법제화 되었고 양종(兩宗)과 승과(僧科) 등도 유지되었다. 또 1474년(성종 5) 시강관 이맹현(李孟賢)이 김해 감로사(甘露寺) 노비가 수백 명인데 승려들이 사비(寺婢)를 간통하므로 사원노비를 혁거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1477년(성종 8)에는 현석규(玄碩圭)가 “오직 승려만이 조세와 부역을 피하고 무리들이 너무 많아 감히 불의를 행하니, … 지금 출가하는 자는 날로 늘어나고 노비가 있는 사찰 또한 많습니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불교계는 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연산군대에는 원각사의 조라치(照羅赤)를 혁거하라는 상소가 이어져 마침내 혁거하였으며, 왕패가 있는 능침사원 외에는 사원의 전지와 노비를 추쇄하도록 하였다. 1505년(연산군 11)에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위한 사사전을 포함해 전국의 사사전을 속공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곧이어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은 즉위 다음해인 1506년 10월 수륙사, 능침사 등 왕실관련 사찰은 조종(祖宗)을 위한 것이라 하여 혁거 대상 사위전(寺位田)을 환급하려고 하였으나 대간 등의 반발이 일어나자 11월에는 “사사전은 조종조부터 있었고 내가 새로 만든 것이 아니지만, 경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미 반으로 줄였다.”라고 한 것으로 볼 때 당시 반만 환급되었던 것 같다. 1508년(중종 3) 김정(金淨)이 “외방 사찰의 토지와 노비가 매우 많으니 이를 속공한다면 국가에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상소하였고, 결국 1516년(중종 11) 능침을 제외한 모든 사원노비를 속공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사원노비는 모두 혁파되었다.

명종대에 문정왕후가 집권하면서 다시 선교양종과 승과가 부활하였다. 양종에서 주지를 선발하여 보낸 사찰 수는 395사에 달하였고 그 대부분이 내원당으로서 이들 사원전에는 세를 거두지 못하게 하였다. 왕실재정을 관할하는 내수사에서는 내원당 사찰에 금표(禁標)를 쳐서 역승(役僧)을 금지하고 재산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내수사에서는 내원당 사찰을 직접 관리함으로써 사찰들을 보호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내수사의 재정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1566년(명종 21)에 양종이 혁파되면서 능침사의 수조지를 제외한 대다수 내원당 사찰의 수세지가 국가에 재차 속공되었다가 다시 내원당 사유지와 수세지가 내수사로 이속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전기는 왕조에 따라 억불과 숭불이 반복되었지만 유학자들의 지속적인 배불상소에 따라 사원전과 노비가 점차 속공되어 갔다. 선조대에 이르러 국가 공인의 종파마저 해체되고 면세지와 노비도 없어진 상황에서 불교계는 점차 자구책을 마련하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갔고, 그 과정에서 임진왜란의 전란기를 맞이하였다.

Ⅳ. 조선후기 국가정책과 사찰 운영

조선후기 승려의 국역과 잡역은 온전히 승려의 몫이 되었다. 조선전기까지 국가의 부역에는 대체로 사원노비가 동원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승려가 직접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승려의 부역은 승병체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주지하다시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승려들은 점차 도총섭제도로 재편되었다. 조선전기까지 국역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승려들이 요역을 담당하는 일원이 되면서 승병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사회적 지위 하락을 수반하였다.

조선후기 첫 번째 도총섭은 1592년 임진년 7월 의주에서 피난 중이던 선조가 묘향산의 휴정을 불러 국난 타개를 부탁하면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의 직함을 내렸던 데서 비롯되었다. 팔도십육종도총섭은 전국 8도 선종과 교종의 도총섭이라는 의미에서 16종 도총섭이라고 하였다. 도총섭이라는 말은 중국 원나라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말선초의 고승들에게서도 그 칭호가 사용된 용례가 있지만 본격적인 제도로서 성립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후 승려들은 도총섭 제도를 통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고, 국가로서도 승려들을 요역에 합법적으로 동원하여 적극 활용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승군은 궁궐의 담장을 쌓는 일, 오대산 사고의 수비, 산성의 수축과 수비 등에 동원되었다. 특히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 7월에 착공하여 인조 4년(1626)에 완공되기까지 승군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는데, 남한산성 축성을 감독했던 벽암 각성(碧巖覺性)에게는 8도도총섭의 직첩이 주어졌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축성과 더불어 산성 내에 9개의 승영(僧營) 사찰을 증축하여 산성 수비를 승군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때 산성의 수비가 승군의 몫으로 정착됨으로써 조선후기 승군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도총섭이 전국적으로 승려를 조직하여 통괄하는 업무를 가졌던 것은 북한산성의 승영 체제가 갖추어지는 숙종대에 본격화된다. 북한산성은 숙종 37년(1711) 4월에 수축을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완공되는데 그 주역 역시 승군이었고, 북한산성의 승대장이 팔도도총섭을 겸직하였다. 당시 초대 승대장에 화엄사 승려 계파 성능(桂坡聖能)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승군의 운영은 점차 확대되어 1757년(영조 33)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소개한 승영사찰․총섭․승장의 관계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산성․읍성․관액(關阨)만 해도 무려 37개 지역 97개 사찰에 이를 정도인데, 이들 사찰의 주지는 총섭 또는 승장으로 불렸다.

승려들이 각종 부역에 동원되었던 것은 승려의 노동력이 일반 민정(民丁)보다 월등하다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종대 광주부윤 심지명(沈之溟)은 이미 “"병자년에 승군의 힘이 가장 도움이 되었습니다. … 민정 3일 일한 것이 승군 하루 일한 것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대개 승려들은 부역할 때 죽을 만큼 힘을 다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전기까지 유학자들은 불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도이며 승려들은 국역에도 참가하지 않는 놀고먹는 백성이라고 비난하면서 배불적 태도를 견지하였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승려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결국 숙종대의 이름난 유학자 윤휴(尹鑴)가 승려를 호적대장에 등재하자고 주장하였고, 그 건의는 받아들여져서 승려들도 마침내 호적대장에 등재할 수 있게 되었다. 승려들은 일정한 거주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토지를 소유한 승려들로 그 대상을 제한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호적대장에 보이는 승려의 신분은 대부분 양인으로 파악되었다. 이로써 승려들은 양인의 일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조선후기 균역법 이후 군역의 실제 담당자가 천민이었던 점에서 본다면 승군은 후대로 갈수록 사회적으로 천민에 버금가는 존재로 인식되었음은 자명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승려들은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자급자족을 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사유재산의 확대와 각종 상업 활동을 통해 사찰을 운영해갔다. 승려의 사유재산은 고려시대부터 보이는데 조선전기 사위전(寺位田)이 대부분 속공되는 반면 승려 개인 소유의 전지는 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양란으로 인해 인구와 전결수(田結數)가 크게 감소하여 세수(稅收)가 줄어든 상황에서 ‘이지출세 이지출역(以地出稅 以地出役)’, 즉 ‘토지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거두고 부역을 지운다’는 원칙 아래 세제개혁을 단행하고 양전(量田)을 통해 세수를 확보하고자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실과 결탁한 원당(願堂) 소유지를 제외한 사찰의 전답도 대부분 국가 수취체제 안에 포함시켰다. 즉 토지를 소유한 사찰이나 승려는 그 전지에 따른 세금과 부역을 담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승려 역시 일반 양인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신분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승려들은 사유재산을 축적하여 제자들에게 상속하면서 향화(香火)와 불사의 자산으로 삼았으며 이를 제자들에게 상속해주었다. 국가 역시 승려의 사유재산을 제자들에게 상속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1657년(효종 8)의 효종의 교령(敎令)에서는 “전답이 있는 승려가 죽으면 그 전답은 여러 족속에게 주고, 잡물은 여러 제자에게 준다.”라고 하였고, 1674년(현종 15)의 교령에서는 “승려의 전답은 사촌 이상의 친족이 있으면 그 상좌에게 절반을 주고, 상좌도 없고 사촌도 없으면 속공하여 그 전답을 본사에 지급하여 승역에 보태도록 한다.”고 하였다. 즉 승려가 제자에게 재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7세기 이후 양민의 사유재산이 늘어가는 시대적 추세에 맞추어 사찰 및 승려들의 사유재산 역시 늘어갔다. 영광 불갑사의 양안(量案)에 따르면, 1658년(효종 9)에는 승려 응천(應天)이, 그 이듬해에는 승려 정림(淨林)이 전답을 불갑사에 시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719년(숙종 45)의 「전주완전면양안(全州薍田面量案)」에서는 소유주를 의미하는 승려기주(僧侶起主)가 전체 소유주의 4.2%, 1720년(숙종 46)의 「의성구산면양안(義城龜山面量案)」에서는 승려기주가 7.5%로서 승려의 전답 소유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1741년(영조 17) 금산 황악산 직지사는 사위전답 30결을 소유하고 있었고, 1747년(영조 23) 영광 불갑사는 사위전답 27결 81부 1속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유 전답이 없거나 그것만으로는 운영하기 어려운 사찰의 경우에는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 했다. 이는 전국 사찰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찰은 운영을 위해 생산과 상업 활동에 뛰어들었다. 승려들이 주목한 생산품은 미투리와 종이였다.

조선전기 미투리는 내수사나 각 관아에 상납한 공물의 하나였다. 강원도 장안사(長安寺)에서 내수사(內需司)에 진상한 공물에는 백자(柏子: 잣)·석용(石茸: 버섯)을 비롯하여 백혜(白鞋)·상혜(常鞋) 등의 미투리가 있었다. 그런데 강원도 평강(平康) 부석사(浮石寺)에서는 대량 주문 생산하여 판매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선조 때의 유생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임진왜란 당시 평강 등지에 피난하면서 당시 전쟁의 고통을 받는 사회상을 적은 󰡔쇄미록󰡕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미투리 상인들이 부석사에서 생산한 미투리를 사려고 모여들었다. 상인들은 부석사 미투리를 저렴한 가격에 매입하여 비싼 가격으로 팔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조선전기 이래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사찰들은 사찰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상인들에게 팔아 운영해갔던 것 같다. 1596년(선조 29) 미투리 가격은 폭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광범위한 지역의 사찰에서 종이를 생산했다. 사찰의 종이 생산은 불경인출을 위한 중요한 수공업으로써 고려시대 이래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대동법이 실시되어 모든 세금이 쌀로 통일되면서 관아에서는 공납품의 부족분을 사찰에서 메꾸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종이인 것이다. 각 사찰은 중앙에 상납할 종이를 제조할 뿐만 아니라 지방 관아에 소용되는 종이까지 납품해야 했다. 산간에 위치한 사찰이야말로 좋은 품질의 종이를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적격지였던 것이다.

전라도의 경우 매년 큰 사찰 80여 권, 작은 사찰 60여 권의 종이를 납품했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그런데 사찰 생산 종이 가격은 시가의 1/3 정도가 지불되었다. 승려들은 종이 생산을 큰 부담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사찰은 잔패(殘敗)를 면할 수 없었다. 1793년(정조 17) “비변사가 아뢰기를, 닥나무를 심는 것은 원래 승려들의 일이었으나 삼남 지방의 사찰이 모두 황폐해져서 승려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림으로써 닥나무밭도 따라서 묵어버렸습니다”라고 하였을 정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찰들은 상인과 연결하여 종이를 매매하고 그 이익으로 사찰을 운영하기도 했다. 1788년(정조 12) “송도 상인의 무리가 승려들과 짜고 방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만 가려 몰래 매매하고 또 별장지 설화지 등을 구입하여 육로로 책문으로 들여보내서 하나의 무역 시장을 이루고 있습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사찰의 종이 생산이 상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의 경제 활동은 사유재산의 확대, 그리고 미투리나 종이 등 특산품의 생산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찰계를 통한 금융업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여 그 수익금으로 불사를 이어가기도 했다. 18세기 이후 금융 이익 창출을 위한 계(契)는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었는데, 사찰에서 행해지던 것을 사찰계라고 부른다. 이 사찰계는 대부분 승려와 신도가 함께 참여하였으며, 고려시대 보(寶)와 같이 고리대금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여 사찰의 운영과 불사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령 은해사의 「병오갑유공비」(1822)에 “병오 동갑의 80여인이 함께 계를 결성하여 각각 자기의 재산을 내어서 10년 동안 힘써 이자를 창출하니 거의 수천 금이 되었다.”고 하였고, 또 은해사 「백흥암중창기」(1850)에 “병자 갑계원이 300전을 내어서 2년 동안 이자를 창출하니 비로소 불사를 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당시 사채가 월10%, 관아의 대부이율이 월3-5%였으므로 사찰의 대부이자도 비슷한 수준에서 정해졌을 것이다. 범어사의 경우는 1722년(경종 2) 이후 모두 63건의 사찰계가 확인되고 그 참여자들의 이름이 지금도 범어사 일주문 앞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전국적으로는 수 백 건의 사찰계가 확인되는데 16세기 이후 20세기 초까지 232건의 사찰계가 연구되기도 했다.

조선후기 대부분의 승려들은 생산과 금융 활동 등 자구책을 통해 사찰을 운영했지만 중앙과 지방 관아의 잡역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었다. 양인의 한 사람으로 전락한 승려들은 국가 수취체제의 일부에 편입되어 있었으므로 온갖 잡역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왕실과 인연 있는 사찰들은 왕실 원당으로 지정 받아 잡역을 면제 받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대한제국시대 왕실 원당 총248건 가운데 설립 시기를 알 수 있는 211건 중 112건이 17세기 이후 지정된 것이다. 시기를 알 수 없는 37건도 대부분 조선후기에 지정된 것이다. 그러나 왕실 원당이라고 해서 잡역이 면제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찰에서는 그때마다 왕실에 잡역 면제를 호소하게 되고, 왕실에서는 잡역을 혁파하라는 完文을 곳곳에 발급하였다. 통도사·송광사 등 전국의 많은 사찰에서 잡역 혁파의 완문이 발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후기 사찰 경제는 국가의 균역법과 대동법으로 인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균역법의 ‘이지출역(以地出役)’ 원칙에 따라 승려들도 국역의 의무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사회적 지위 하락과 더불어 사찰 운영의 어려움을 초래하였고, 대동법의 ‘이지출세(以地出稅)’ 원칙에 따라 면세전이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전기까지 일반 백성이 부담하던 공물의 상당 부분을 사찰이 담당하게 되면서 잡역의 증가로 인해 사찰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전기까지 승려들은 피역자(避役者) 라는 인식이 있었을 정도로 일반 백성에 비해 생활 형편이 나았으나 조선후기에는 역전되어 점차 출가자의 수가 급감함으로써 폐사되는 사찰이 늘어나는 상황이 되었다.

Ⅴ. 맺음말

신라·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가의 신앙이 되었던 시기다. 국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계층에서 불교를 신봉하였다. 자연히 사원경제 역시 풍족했을 것이다. 승려들은 존경받고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충분히 가졌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승려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수행자도 있었지만 많은 승려들은 탐욕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충효인의를 앞세운 유학자들에게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조선 건국과 더불어 불교는 권력자들에게 배척받기에 이르렀다.

조선 건국의 주역자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국가를 개조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사찰 소유의 경제권을 빼앗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국가로부터 시납 받은 면세전과 노비를 속공함으로써 수행자 본연의 무소유를 강제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명분은 장기적으로 이어졌다. 왕조에 따라 신앙의 부침은 급격하였지만 사찰 경제권의 국가 귀속의 방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16세기에 이르러 사원경제는 자급자족으로 내몰렸다.

조선후기 사찰들은 스스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양란 이후 승려들은 실질적으로 양인과 같은 신분이 되었다. 국가에서는 대동법과 균역법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승려들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역과 잡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승려들은 국가의 부역에 동원되면서 미투리나 제지업을 통해 창출한 수익금으로 사찰을 운영했다. 그리고 사유 전지를 확보하여 사찰 운영의 재원으로 사용하였다. 18세기 이후 승려들과 재가자들은 계(契)를 조직하여 고리대금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금으로 불사를 이어갔다. 조선후기 사찰 승려들은 수행자이면서 사찰 경영의 사업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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